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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나라망친 명 만력제, 조선에서 숭앙받다
국정 돌보지 않으면서도 조선에는 병력ㆍ식량 지원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09/19 [07:35]
[김쌤’s 한국사] =임진왜란은 중세 후반, 직접적으로는 명(한족의 중국), 조선, 일본이 각축을 벌인 국제 전쟁이었다. 전쟁의 불똥이 명에 튈 것을 염려한 명은 급히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때 조선에 원군 파견을 결정한 명의 황제가 신종, 곧 만력제(1368~1644, 재위 1573~1620)다. 이 만력제는 명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 청나라의 개국공신, 고려 천자, 파업황제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만력제의 엽기는 업무 거부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무려 30년간을 정사를 돌보지 않아 국가 운영이 난장판이 된다. 황제에 오른 초반 10년은 장거정(이성량=북로, 척계광=남왜를 발굴)이라는 대학자 겸 정치인이 섭정역을 했으므로 만력제가 실제 정사를 돌본 것은 임진왜란이 거의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 괴산 만동묘정비(槐山 萬東廟庭碑,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 1978년 10월27일)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 만력제를 기리기 위해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 사진=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이 만력제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임진왜란때 조선을 물심양면으로 돌봤는지는 그의 이전이후 행적을 보면,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거저 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01. 즉위초 성군의 자질을 보이던 만력, 갑자기 돌변
①명의 시조인 주원장은 황제 독재 시스템을 구축, 황제의 결재가 없으면 국정이 마비될 지경. 황제의 격무를 분산하고 적절한 조언을 하는 계층이 바로 환관. 따라서 환관과 관료와의 대립이 심한 편.
②만력제는 즉위 10여년간 자성황태후 이씨의 후원을 받는 대학사 장거정과 환관 풍보가 협력해 국정 수행과 개혁 추진.
③장거정은 관료의 기강 확립, 태만한 관료의 숙청, 황하 하류의 치수, 토지ㆍ세제 개혁인 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의 업적. 외치에서는 척계광과 이성량(이여송의 조부)이라는 출중한 장수를 발굴, 북로남왜를 토벌하고 준동을 봉쇄.
④대학사 장거정과 환관 풍보의 협력으로 국정을 이끌던 만력제는 장거정이 사망(1582년, 만력10)하자, 폭군의 기질을 드러내 장거정을 부관참시하고 풍보도 파면.
⑤장거정 사후 만력제의 돌변은 장거정, 풍보, 자성황태후 등의 이중성(청렴결백 속에 숨겨진 부정축재와 권력 농단 등)이 드러나자 만력제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정치에 극도의 환멸을 느꼈다는 후대의 해석도 있을 정도.
 

02. 총애 정귀비의 소생(3남) 태자책봉하려다 실패
①만력제는 후궁 정귀비를 총애해, 정귀비 소생 3남(주상순)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나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 그러자 장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늦추고 늦추다가, 장자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태자에 책봉(1601년).
②후계자 문제가 중요한 왕조국가에서 황제가 태자 책봉을 한사코 미루자, 어머니 자성황태후가 조속한 태자 책봉을 촉구. 만력제, 주상순의 생모가 궁녀 출신이라는 핑계를 대며 자성황태후의 심기를 거슬러.
③자성황태후도 융경제의 승은을 입은 궁녀 출신이라, 만력제와 자성황태후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④총애하는 정귀비의 소생을 황태자로 책봉하지 못한 탓인지, 만력제는 점차 정사를 게을리 했고, 3남 주상순을 복왕(福王)에 봉했지만 임지인 낙양으로 떠나지 않고 황궁에 잔류.
⑤결국 ‘정격안’이라는 태자 암살미수 사건(1615년)이 발생하며, 쟁국본(후계자 승계 다툼)일단락. 복왕 주상순은 암살미수 전 해(1614, 만력42)임지인 낙양으로 부임.
⑥선조 자신이 서자출신이라는 출생 콤플렉스가 있는 상태에서 장자 임해군은 천하의 난봉꾼이라 차남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하나, 사대관계인 명의 상황도 만만치 않아 광해군의 세자 책봉과 즉위 과정도 온갖 우여곡절 겪어.
 

03. 정사를 팽개친 황제, 주색에만 골몰
①정사를 팽개친 만력제는 자신의 무덤공사 관람ㆍ감독, 보물 감상, 주색에만 골몰하며 개인 재산 늘리는 것에만 관심. 국가 재정은 비단ㆍ도자기ㆍ은광 개발 등으로 굴러가는 정도.
②10만명의 궁녀와 환관의 시중 속에 환락생활을 하며 변태적 취미로 몽둥이나 채찍으로 재위 20년동안(1592년 까지) 1000여명의 내시ㆍ궁녀 살해.
③장거정의 개혁, 동림당의 등장, 양명학의 발흥 등 부분적 개혁이 있었지만, 황제가 정사를 팽개친 상태(황제 독재권)에서 집권층이 받아들이지 않아 흐지부지.
④나라 망친 군주들의 일반적인 행태가 사치ㆍ음란ㆍ잔인ㆍ대규모 외정 등이었던 것과 달리 만력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 멸망’시켰다는 해석도. 만력제 본인도 말년에 “짐은 무위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했다는.
⑤만력제 재위 당시 ‘만력삼대정’이라 해서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란ㆍ정유재란), 영하의 난(오르도스 보바이의 반란, 1592년), 양응룡의 난(1597년~1600년)이 발생하며 재정 위기 내몰려.
⑥명의 연간 예산은 은자 600만냥인데, 만력삼대정에 은자 1200만냥을 투입. 총애 정귀비의 소생 3남 복왕 주상순의 결혼식 비용(1599년)은 은자 2400만냥이라는 설도 있다. 한달간 술에서 깨지말 것을 명령해 연간 GNP의 절반을 썼다는 설도.
⑦명의 풍부한 재정은 은광에 부과한 ‘광세(鑛稅)의 화’로, 만력제는 환관을 보내 은광을 개발하고 세금을 거뒀는데, 현지 환관의 가렴주구가 소주, 산동의 민란으로 이어져.
 

04. 만력제, 조선을 위해 6000억원 식량 원조
①만력제, 대신들의 반대 속에 조선에 지원병력 파견 결정은 ‘쟁국본’과 ‘태업’으로 신료들과 갈등 중 황제의 권위를 위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
②당시 왜는 전국시대라는 전란 속에서 세계최강 수준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30만으로, 당시 이 정도 병력 동원은 세계적으로 명과 오스만 제국 정도에 불과.
③왜구의 침입으로 중국 동남부해안에서 엄청난 피해를 봤던 명의 입장에서, 왜의 정규군이 조선을 정복하면 조선의 물자와 인력으로 명을 침공할 것이므로 사전에 방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전략적 판단도 한 몫.
④명의 참전(연 인원 20만)으로 왜의 군사행동이 제약을 받은 것은 확실시. 당시 조선은 동원병력 규모가 6만~7만정도였고, 훈련도감 소속 삼수병ㆍ속오군은 2000명(직업군인)인데도, 급료 지급에 어려움 겪을 정도.
⑤왜적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 명의 재정을 털어 곡창 산둥성의 쌀 100만석을 사서 원조. 공양미 300석이 현재가치 20억원 이상이므로 100만석은 6600억원을 웃도는 규모.
⑥무게로 따져도 쌀 100만석은 8만~9만톤으로 운송에 들어간 비용은 별도.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석이 조선에 운송, 각처에 나누어 구제’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⑦<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란 의병장이던 조경남(1570~1641)이 1585년(선조15)~1637년(인조15) 조선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것. 후일 <선조수정실록>을 엮을 때, 조정에서 원본을 빌렸고, 규장각에서 만든 사본의 전문이 지금까지 보존.
 

05. 명은 왜 그토록 조선을 도왔나?(야사와 구전 등)
①조선 후기의 군담소설 임진록에서는 조선 사신의 정성에 감동했다라고 만.
②꿈에 삼국지의 관우가 나와서 선조는 장비의 환생,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라고 일러 지원 결정했다는 구전도.
③명나라 파견 사신 수행 조선 역관 홍순언이 연경의 초호화 기방에서 누명을 쓰고 몰락한 명문가 딸 출신의 기녀를 구해줘. 기녀는 기방에서 몸을 빼내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애첩이 돼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 출병을 애걸.
④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만력제를 기리기 위한 만동묘ㆍ대보단(숙종) 건립.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도. 조선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까지도 제사를 지내며 존중.
⑤이여송의 군마 1만2000~1만5000에게는 제대로 보급을 못 해 굶겨 죽였다는 기록도.
⑥만력제의 3남 복왕 주상순(1586년 2월22일~1641년 3월2일, 몸무게 180kg)은 낙양에서 이자성의 반란에서 사로잡혀. 이자성 군대는 복록연(福禄宴)이라는 연회를 열어 사슴고기와 함께 주상순을 삶아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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