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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광해군(재위 1608년~1623년), 반정으로 몰락
왕권강화 무리수, 명청교체로 혼란기의 개혁 마치지 못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07 [07:44]
[김쌤’s 한국사] = 임진왜란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차기 왕위계승자로 떠오른 광해군은 막상 전란이 끝나자 선조의 오락가락과 후계자 구도 때문에 불안한 상태에 몰린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새롭게 떠오르는 여진에 촉각을 대비하며 방비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조선 내부의 지배층은 전란의 복구보다는 사회안정을 위한 반동적 정책으로 백성을 옥죄기에 급급했다.
왕권의 기반이 허약한 광해군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기 힘든 상황에서 ‘명청교체’라는 외부적 요인도 광해군을 괴롭힌다. 
 

01. 광해군 임진왜란 수습하며 능력 발휘
①임진왜란을 맞은 선조는 광해군에게 분조(分朝, 1592년 6월14일) 위임. 광해군 평안도ㆍ함경도ㆍ강원도ㆍ황해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전투 독려, 군량 보급 등 활약.
②광해군, 명과 왜군의 화의 교섭 중 명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순행하며 민심 살펴(1593년 10월~1594년 8월).
선조,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 명, 맏아들 임해군을 이유로 고명 거부하며 광해군에게 다섯차례 세자 퇴위 종용.
③명의 황제 신종은 총애 정귀비 사이의 3남 주상순을 내심으로 지원하며 장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던 상태. 명의 조정은 조선의 광해군을 세자로 승인해주면, 이를 빌미로 신종(만력제)이 장남 주상락 대신 3남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우려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 거부.
④선조, 정비 의인왕후 박씨 사망(1600년 6월, 46살)하자 김제남의 딸을 계비(왕후)로 맞아들여(1602년). 선조는 51살, 인목왕후 김씨는 19살이어서 둘 사이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가뜩이나 불안한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불안정.
⑤인목왕후, 영창대군 출산(1606년 1월, 선조 55살이고 인목왕후 23살). 조정은 영창대군 지지(소북, 유영경)와 광해군 지지(대북, 이이첨 정인홍)로 갈라져.
 

02. 임란이후 즉위 초기, 전후복구 총력
①광해군, 다사다난하지만 34살의 나이로 즉위(1608년 2월2일), 즉위 초 <비망기(2월23일)>에서 당파의 구별없이 인재 선발지침 밝혀.
②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이항복(서인이었지만, 중립을 지켰다)과 이덕형(남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으나, 당색이 짙지 않았다)도 중용해 광해군 초기 세 사람이 번갈아 정승직 맡아.
③대북파 실세(정인홍, 유희분, 이이첨 등) 불만 속에 서인(이귀, 김류, 정경세 등)과 일부 남인들이 일종의 연립정권 구성.
④선혜청 설치(1608년), 경기도 일원에 대동법 실시 → 민초의 세금부담 줄여.
대규모 양전사업 통해 경작지를 넓히고 국가재원 확충(1611년, 광해군3). 왜란 중 불탄 창덕궁 수리ㆍ종묘 중건ㆍ관청 재건. 인경궁ㆍ경덕궁ㆍ원구단 등 건조하며 토목공사 비용 충당을 위해 증세정책.
⑤대북정권, 토목공사에 필요한 은, 목재, 석재를 바치면 관직을 파는 등 매관매직 일삼고, 전국에 조도사를 파견해 공사비용 횡령 등 백성들의 원성.
⑥<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 간행. <국조보감> <선조실록> 편찬. 허균 <홍길동전>, 허준 <동의보감> 도 선보여.
⑦유구에서 담배가 들어와 민간에 널리 보급(1616년).
 
▲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했던 이항복은 결국 유배를 당한다. 경기 포천의 이항복 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24호 1975년 9월5일 지정)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03. 군비 확충하며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다
①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압박과 명의 통제에서 벗어난 여진족이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통합 움직임.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지원병 파견의사를 두 번이나 밝힐 정도로 이미 강대한 세력 형성. 함북으로 진격했던 왜의 가토 기요마사군은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경계를 침략하지만 강력한 반발에 퇴각하기도.
②광해군,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됐던 하세국에게 6품직 사과(司果)를 제수(1611년)하는 등 적극적인 정보수집활동. 본래 역관이었던 하세국은 ‘노추(奴酋 누르하치)가 배를 건조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여진을 정탐(1608년)하던 중 체포돼 고초를 겪은 인물. 이후 강홍립ㆍ김경서의 사르후전투에도 향도로 참전.
③광해군,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기유약조 1609년 광해군 1)체결. 오윤겸을 회답사로 파견해 조총, 장검 등을 구입(1617년).
④누르하치, 후금(後金) 건국(1616년, 광해군8). 광해군, 국방태세 점검, 대포의 주조 독려. 평양 감사에 박엽, 만포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는 등 후금의 동향 파악 주력.
⑤후금과의 전투에서 연패한 명은 조선에 원병 요청(1618년 윤4월27일). 광해군은 두차례 파병을 거부했지만, 이이첨 등 비변사에서 파병 적극 주청.
⑥당시 정국은 폐모(인목대비) 논의, 궁궐 건설 등 내정의 현안들이 많은 상태였고, 명의 압력과 신하들의 주청에 못이겨 파병 수락.
⑦강홍립이 이끄는 조선 1만5000군 심양 부근의 사르후 지역으로 출전(심하전역 深河戰役, 사르후 전투 1619년2월 광해군11).
⑧명의 총사령관 양호(임진왜란때 조선을 지원했던 장수)의 사로병진이 어그러지며, 명군 각개격파 당하며 궤멸. 조선 강홍립군, 명의 본진이 격파당한 상황에서 선천 군수 김응하ㆍ운산 군수 이계종ㆍ영유 현령 이유길 등 전사하는 등 곤경 처하자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여진에 투항(1619년 3월5일)
⑨사르후 전투의 패전 이후 광해군, 1622년(광해군 14년) 이후 모든 무과 합격자를 변방으로 배치, 향리 은거 중이던 의병장 곽재우를 북병사로 제수. 강화도 정비 등 여진의 위협에 대비.
⑩당시 후금군(여진)은 대륙 최고의 철기부대를 보유한 강군.

기사입력: 2017/11/07 [07:4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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