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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광해군, 연이은 옥사로 민심 이반
지배층, 성리학 질서 흔든 폐비살제 맞서 반정(反正)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09 [06:58]
[김쌤’s 한국사] = 광해군이 왕에 오르고는 유난히 옥사가 많았다. 옥사는 역모와 관련된 것이라, 일반 백성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지배층 내부의 동요를 불러와 정상적인 국정운영에 부담을 준다. 선조의 유지를 왜곡한 유영경의 사사는 예견했던 상황이지만, 연이은 옥사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에 결국은 인조반정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다.
 

01. 광해를 흔드는 세력에 맞서, 연이은 옥사 등 무리수
①광해군, 세자 책봉에 반대한 유영경(1550년 명종5~1608년 선조41, 동인이 남북으로 분열할 때 북인에 가담) 제거. 유영경은 종전 이후 광해군의 선무공신 책봉 반대,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 지연 등 반 광해군 책동.
②친형 임해군, 명이 광해군의 즉위에 의문을 갖고 조사하자 자신이 왕이 되려는 망상을 품다가 광해군이 강화도에 귀양 조치. 윤양ㆍ민덕남ㆍ윤효선ㆍ이사경 등, 임해군의 사병 양성 사실 발고(1608년 2월14일).
③임해군 귀양조치 직후 임해군 추종 고언백, 박명헌, 운원도정 등 100여명 처형.
④진도를 거쳐 강화도 유배중인 임해군, 대북의 실세 이이첨 등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수문장 이정표를 시켜 임해군 목졸라 살해(1609년 5월3일, 광해군1).
⑤사림 5현의 문묘종사(1611년, 광해군3)에 정인홍(1535년, 중종30~1623년, 인조1)이 이언적과 이황의 종사 반대.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할 때, 북인으로 좌정한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이언적과 이황과는 학문적 라이벌.
⑥김직재의 옥사(1612년, 광해군4)를 빌미로 소북파 인사 제거.
⑦칠서의 옥(1613년)을 계축옥사로 발전시켜 영창대군(당시 7살, 1614년 결국 피살)-인목대비-김제남 등 제거 시도. 이중 인목대비만 살아남지만 유폐(1615년, 광해군7)후 결국 폐모(1618년, 광해군10).
⑧신경희의 옥사(1615년)를 계기로 대북파, 능창군이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역모의 주인공으로 몰린 능창군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결. 신경희 처형, 양시우ㆍ김정익ㆍ소문진ㆍ김이ㆍ오충갑 등 유배.
⑨이이첨과 정인홍 등, 폐모론을 제기하며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1617년).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던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은 유배.
 
▲ 인목대비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1973년 7월10일 등록~2010년 1월4일 해제). 인목대비(1584~1632)가 영창대군을 잃고 폐모의 위기에 몰려 용주사의 암자였던 칠장사로 피해 있을 때 쓴 것으로 추정(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02. 서인, 인조반정으로 광해군ㆍ대북정권 몰락
①서인 김류, 이귀, 김자점 등, 능창군의 형 능양군과 손잡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 성공(1623년 3월13일 삼경(밤 11시~새벽 1시)
②서인 중심의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 거부,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 계모 인목대비 폐모 등.
③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청이 광해군 복위라는 압력 행사를 두려워 해 제주도로 유배. 병자호란때 청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공언. 광해군, 제주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641년(인조 19년) 7월1일 67세에 사망.
④인목대비, 칠서의옥에서 시작한 계축옥사로 부친 김제남 사망, 아들 영창대군 이듬해 사망 등으로 광해군에게 앙심. 일부 권신들이 인목대비의 행실을 꼬투리삼아 처벌 권유했지만, 광해군은 5년 이상 끌다가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폐모) 서궁에 유폐.
⑤인목대비 폐모는 이이첨 등 일부만 찬성하고, 조야에서 모두 비판이 거셌던 조치(반대했던 이항복 등이 유배 조치).
⑥광해군은 세자 때부터 왕위를 도전하는 반대세력 제거. 태종 동생을 죽이고 즉위,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는 숙부ㆍ아들ㆍ며느리를 제거.
 

03. 왕권강화에 절치부심하던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몰락
①임란 직후 조선은 ‘정씨 왕조설’ 등으로 ‘이씨 왕조’를 부정하는 도참설이 횡행. 도성인 한양도 궁궐 파괴 등으로 민심 피폐. 광해군, 임진강 가의 교하(파주 교하면 일대)로 천도를 계획하고 기초공사를 시작하지만, 재정부담과 명의 병력 요청 등 중단.
②포도청을 상설기구로 만들어 사회불안에 대비, 군사시설인 진보(鎭堡)의 확충 등으로 외침에도 대비.
③광해군, 인재 등용 명분아래 서얼ㆍ노복도 중용. 훗날 “명기(名器, 어진 신하)를 뒤섞이게 하고 벼슬을 뇌물에 팔았다”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광해군일기 권139, 11년 4월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1초(哨, 100명단위)라도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 군사를 요구하는 글이 명나라에서 두 번이나 왔을 적에 내가 걱정한 바는 곧 원병을 보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심이 본래 굳건치 못하고 군사가 평소에 교련이 되어 있지 않아 하루아침에 몰아 들어가더라도 싸움에 도움을 주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투항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를 절통해 하는도다.
지난해 명에서 청병하여 왔을 적에 경들은 마치 북 한 번 울리면 싹 쓸어 버릴 것같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야 병가(兵家)의 일이 어찌 두렵지 않은가? ······ 내 이를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근심 걱정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더욱 돋아 발광할 지경에 이르렀도다.

 
기사입력: 2017/11/09 [06:58]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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