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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칠서의 옥, 결국 영창대군을 죽이다
광해군, 연이은 옥사로 눈밖에 난 선비 제거 등 자충수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10 [07:09]
[김쌤’s 한국사] = 선조의 갑작스런 승하(사망)로 왕위에 즉위한 광해군은 선조의 죽음이 석연치않다는 이유로 즉위초반부터 독살설 등에 시달렸다.
왕권안정을 위해서는 반대파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거해야할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유영경(1550년 명종5~1608년 선조41)이었다. 광해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선조의 유지를 숨겼다가, 광해군이 왕이 되자마자 이이첨ㆍ정인홍의 탄핵으로 유배후 사사됐다.

또 하나는 광해군 즉위에 대해 명나라가 진상조사단을 파견, 왜 장자인 임해군을 젖히고 광해군이 왕에 올랐는지를 조사했다. 임해군(1574년 선조7~1609년 광해군1)의 막장짓거리는 나중에 소개하도록 하고, 대북 정권은 왕권의 위협요소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진도 유배했다.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했고, 이듬해 죽음을 당했다.

이후 광해군은 수많은 옥사를 벌이는데, 이중 상당수는 친국(왕이 직접 죄인을 심문하는 것)했으며 역모가 거짓으로 드러나도 밀고자를 무고 등의 혐의로 처벌하지 않아 역모고변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01. 김직재의 옥(1612년 2월, 광해군4)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이이첨)가 소북파(유영경 등 영창대군 지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 진릉군도 피해.
①김경립이 군역을 피하려고 어보(御寶)와 관인을 위조한 것을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적발(1612년 2월, 광해군4). 신율은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데에 착안, 반역으로 몰아가기 위해 당시 조정의 불평분자였던 김직재(1554년 명종9~1612년 광해군4)ㆍ김백함 부자(父子)를 엮어.
②김직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종군(從軍)하는 과정에서 상중의 선비가 고기와 술을 마음대로 먹고 마셔 양반의 체통을 잃었다고 직첩(職牒)을 환수 당해.
③우여곡절 끝에 돌려받은 직첩을 광해군때 늙은 어머니를 학대했다며 다시 환수하자 불평불만.
④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신율은 김경립의 동생 김익진도 붙잡아 반역군 사령과 팔도도대장(八道都大將)이 김백함이며,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꾀했다고 고문.
⑤김경립도 역모에 참여(동생 포함)했으며, 8도에 각각 대장과 별장을 정해 때가 이르면 서울을 함락시키려고 했다는 허위진술을 고문으로 강요.
⑥김백함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라는 허위 사실을 인정하고, 게속된 고문에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 정언 정호서 등의 이름을 불어.
⑦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고명을 받은 유교7신의 한명인 박동량(1569, 선조2~1635, 인조13)은 연루자를 풀어주는 등 옥사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당하기도.
⑧옥사는 자가발전을 거듭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 태경을 추대하려 했으며, 이이첨 등 대북파를 제거하려 했다는 시나리오까지 나와.
⑨김직재ㆍ김백함 부자(夫子),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 등 처형. 김척ㆍ유팽석ㆍ김일승ㆍ정몽민ㆍ유선ㆍ황혁ㆍ조수륜ㆍ권필ㆍ황상ㆍ김덕재ㆍ김삼함ㆍ김강재 등 고문으로 사망하는 등 100여명 피해.
 
 
02. 칠서의 옥, 계축옥사(1613년 3월, 광해군5)
왕권위협 요소 영창대군, 인목대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영창의 외조부) 등 제거하려는 옥사.
①광해군지지 대북파와 영창대군지지 소북파가 각축하는 가운데 광해군을 왕으로 한다는 선조의 유지를 빼돌린 유영경은 광해군 즉위 직후 사사(賜死)처분.
②이이첨 등 대북파는 소북파(영창대군 포함) 축출 명분을 찾던 중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한 강도사건 발생(1613년 3월).
③범인은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간의 서자 박치의,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서얼 허홍인 등 7명.
④박응서ㆍ심우영ㆍ서양갑ㆍ박치의ㆍ이경준ㆍ박치인ㆍ허홍인은 허균ㆍ이사호ㆍ김경손(김장생의 서제) 등과 사귀면서 ‘죽림칠현’ ‘강변칠우’라고 자칭.
 
▲ 경기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의 영창대군묘(1606~1614, 경기도 기념물 제75호, 1983년 9월19일 지정).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8살의 물정도 모르는 나이에 결국 죽었다.     © 경기도민뉴스

⑤‘강변칠우’는 연명으로 서얼금고 폐지 상소(1608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기도 여주 강변에서 당여(黨與) 창설(1613년 초). ‘강변칠우’는 무륜당(無倫堂, 윤리가 필요 없다)을 짓고 나무꾼ㆍ소금장수ㆍ노비추쇄인 등을 가장해 전국을 무대로 강도행각 중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 피살자의 노복 춘상(春祥)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하며 일망타진.
⑥이 사건을 대북파의 이이첨, 심복 김개ㆍ김창후 등이 포도대장 한희길ㆍ정항 등과 모의,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 고문으로 허위사실 강요. 이를 위해 강변칠우 중의 하나인 박응서를 꼬드겨 비밀상소를 올려 옥사 시작.
⑦박응서는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암살해 사회혼란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비축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했다고 거짓자백. 성사 후 영창대군 옹립,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행각 거짓자백.
⑧두목으로 지목된 서양갑은 역모를 부인하다가 어머니와 형제가 고문으로 죽자, 배후(首倡者)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라고 지적.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광해군의 압박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 인목대비도 모의에 가담했다고 허위자백.
⑨사건 연루 종성판관 정협,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ㆍ박동량ㆍ한준겸 등 7대신, 이정구ㆍ김상용ㆍ황신 등 서인 수십명이 지정자(知情者)로 몰려 수감.
⑩사건 수사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김제남 사사, 김제남의 세아들도 참화.
⑪영창대군 서인 강등돼 강화도 위리안치됐다가 이듬 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증살).
⑫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 서인ㆍ남인들이 대거 유배 또는 관직삭탈당하고 쫓겨나. 결국은 인목대비도 폐위, 서궁 유폐(1618년).
⑬인조반정 이후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 역모를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1623년).
⑭강변칠우 중 박치의는 도주, 이후 행방 묘연.
 
 
03. 신경희의 옥(1615년 8월14일, 광해군7)
①능창군의 의붓외삼촌 신경희가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고변, 양사ㆍ홍문관에서 능창군을 국문할 것을 청하고 광해군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친국(8월22일) 후 하옥했다가 강화 교동도로 유배.
②역모혐의 체포자 중 소명국(蘇鳴國)이 ‘신경희는 윤길 등과 사람을 모아 흉모와 은밀한 계책을 몰래 서로 의논했으며,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점을 치고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고변.
③주모자 신경희 처형, 능창군ㆍ양시우ㆍ소문진ㆍ김정익ㆍ김이강ㆍ오충갑 등 유배. 능창군은 위리안치 중 자결(1615년 11월17일, 광해군8).
 
 
04. 허균의 옥(1618년 8월24일, 광해군10)
①광해군, 허균의 역모에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앞에서 친국(1618년 8월24일, 광해군10). 허균은 심문 받는 줄 알고 나왔다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자 경악해 광해군에게 “잠깐만!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라고 외쳤지만 신하들이 “닥쳐라 역적놈아!”라고 욕을 퍼붓고 끌어내 즉각 거열형.
②이후 광해군은 반교문에서 ‘성품이 짐승같은 역적 허균을 잡았으니 대사령을 내렸다’고 기록. 대북세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꼬리 자를 일(인목대비 암살설이 있다)이 생기자, 역적혐의로 몰아 참형에 처했다는 주장은 허균 처형 이후 일족에게 역모죄로 몰아 멸문의 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도 짐작.
③일의 발단은 제자인 기준격이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한다’는 비밀상소(1617년 12월)에서 시작.
④기자헌은 불교에 심취해 불경을 섭렵한 허균에게 아들 기준격을 보내 글을 배우게 했는데, 자유분방한 허균은 기준격 앞에서도 위험한 언행을 내비쳐. 그러던 중 허균이 폐모론에 반대한 기자헌을 탄핵 해 유배를 가게하자, 기준격이 격노해 상소를 올린 것으로 후대는 해석.

기사입력: 2017/11/10 [07:09]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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