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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누르하치, 굴욕을 딛고 북방 최강자로 성장
임진왜란 혼란기 틈타 건주여진 통일…청(후금) 건국 초석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14 [05:38]
[김쌤’s 한국사] = 중국에서는 여진족을 생활지역에 따라 요동의 건주여진, 중국북방의 해서여진, 러시아 근처의 야인여진 등 크게 3개부족으로 구분한다. 해서여진은 예허부가 중심이고, 건주여진은 좌위와 우위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국은 명나라때 ‘이이제이(이민족 분열정책)’정책을 충실하게 적용해 이민족을 견제했다.

명나라 입장에서, 중국에서 쫓겨나 북원을 건국한 몽골족은 특히 위협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명은 유목과 농경으로 명에의 의존도가 높은 여진을 적극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남 몰래 힘을 키운 건주좌위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무력으로 통합하고, 명에 선전포고를 하며 자신을 ‘만주’라고 자칭한다. ‘질긴 멧돼지 가죽’이라는 의미를 지닌 ‘누르하치’는 굴욕을 참고 참으며 후금을 건국, 청의 시조가 된다. 
 
 
01. 누르하치, 이성량이 준 배상금을 군자금으로 활용
①명의 이성량, 건주여진의 지배자 왕고의 양자(養子) 아타이가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손잡고 대항하자, 아타이 정벌(1583년).
②명의 이성량을 돕던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 부 탁시가 아타이의 아내(교창가의 손녀이므로 누르하치와는 형제간)를 구하기 위해 아타이를 찾아간 사이 이성량이 화공으로 아타이 공격. 이 와중에 조부ㆍ부친이 함께 사망(누르하치의 7대원한 중 하나)
③이성량, 누르하치(당시 25살)에게 속죄의 뜻으로 칙서, 마필(50) 등 하사. 이것이 누르하치의 군자금.
④이성량의 지원 아래 누르하치는 7년만에 건주여진을 통합(1583~1589)하며 요동지역을 안정시켜. 해서여진은 예허부와 하다부의 갈등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교역의 중심이 건주여진으로 이동.
⑤모피ㆍ인삼ㆍ진주 등을 식량과 교역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해서여진의 예허부가 누르하치에게 건주여진의 영토할양을 요구하자, 누르하치 “나는 만주”라며 거절.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자신을 만주라고 부르며 여진과 차별화 시도한 듯.
 
▲ 생활지역에 따른 여진족의 구분.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02. 누르하치, 9개부족 연합군 격퇴하며 여진족 통합 발판
누르하치의 세력이 강대해진 상황이지만, 당시 요동의 실력자인 이성량은 탄핵으로 직위를 물러난 상태였다. 그리고 왜가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터졌다. 명의 강력한 영향력과 조선의 견제 속에서 통일을 하지 못하던 여진족은 내부갈등을 겪지만, 결국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통합의 발판을 일군다. 
①영토할양을 거절한 누르하치를 응징하기 위해 예허부를 중심으로 9개부족 3만연합군이 누르하치를 공격하지만, 격퇴당해(1593년).
②앞서 이성량은 어사 장학명의 주청으로 요동총병관에서 해임(1591년 11월). 이후 명이 파견한 후임자들은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해, 결국 이성량이 복귀(1601년).
③이성량의 공백기에 때마침 조선에서 임진왜란(1592년 4월)발발하며, 명과 조선에 혼란이 몰아치자 누르하치는 여진을 핍박하던 명과 조선 등 외부의 방해없이 9부연합군 격퇴.
④누르하치, 해서여진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으로 화약 체결(1597년), 이어 하다부도 만주에 항복(1599년)하며 여진통일 눈 앞.
⑤명, 누르하치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진상조사단(어사) 파견. 당시 예허와 누르하치의 만주는 각각 하다부를 공격하던 상황이지만 명은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해 예허를 지원하며 하다부에는 지원 중단. 명의 지원이 끊어진 하다부는 누르하치 만주의 공격에 버티다 못해 누르하치에게 항복 선언. 
⑥누르하치, 후이파부 병합(1607년)하는 등 해서여진 4부 중 2부 병합(울라부와 예허부만 남은 상태). 누르하치, 해서여진의 울라부와 격돌(1607년). 누르하치 수차례 접전 끝에 울라부 멸망(1613년)시키고 대망의 칸에 즉위(1616년).
⑦누르하치, 여진문자를 만들고 만주8기군 창설. 300명의 소부대 ‘니루’, 5개니루가 1개 ‘잘란’(1500명), 5개잘란이 1구산(즉, 1기 7500명)
⑧당시 여진족 내부 누르하치와 해서여진 울라부와의 격돌은 함경북도병사 이용순이 종성부사 정엽의 보고를 받아 조정에 장계.
 

장계는 여진족 소수부대가 종성부근을 침공한 것을 막아낸 것과 함께 ‘진퇴하며 합전(合戰)하는 상태가 자못 기율이 있어서 예전의 잡호(雜胡)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장수 2명이 각각 붉은 형명(刑名)을 설치하고, 호령할 때에 고둥부는 소리가 멀리 부성(府城)에 들리고, 갑옷ㆍ투구ㆍ창ㆍ검과 전마(戰馬)가 매우 정건(精健)한 것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보고.

장계는 이어 포수(砲手)와 정병(精兵)을 급히 증파해 후일의 변란에 대비할 것을 권고.


 
▲ 임진왜란 이후 사르후 전투가 벌어질 당시의 명-조선-청의 세력 판도.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03. 누르하치, 명의 교역중단 조치에 생존 위한 투쟁
①누르하치가 해서여진의 예허부만을 남겨놓고 만주를 완벽한 세력권안으로 편입하자, 명은 교역정지 조치(1615년, 만력43). 누르하치, 옛 하다부 남쪽의 시하(柴河)ㆍ범하(范河)ㆍ삼차얼(三岔兒) 등에서 대규모 개간을 시작하지만, 결과는 별무신통.
②명의 교역 중단조치에 누르하치, 명의 변경 무순을 공격, 명의 수비 책임자 이영방은 즉각 항복(1616).
③무순 함락 소식에 명의 총병 장승음, 1만병력으로 누르하치 추격해 격돌 순간 갑자기 큰 바람이 불면서 모래먼지가 명나라 군사를 덮쳤고 누르하치는 혼란의 명군을 덮쳐 명의 장승음 전사 등 추격군 궤멸.
④누르하치가 국호를 금(金, 아이신은 여진족에게는 이상향을 의미)으로 정하고 무순을 함락하자, 명은 옛적 여진의 금이 송을 멸망시킨 것에 빗대 경계분위기 고조. 명은 병력과 군자금 부족이라는 내부사정이 엉망인 상태에서 여진정벌을 결정하며 조선에 파병 요청.
⑤명, 누르하치 정벌 위해 양호를 요동경략에 임명 사르후 전투 개시(1619년 3월2일~4일). 총병력 47만이라고 호언하나 실제 병력은 조선의 1만3000과 예허의 2만을 포함해 10만여. 양호는 4곳에서 병력이 출발해 누르하치의 본거지 앞에서 집결, 총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하나 각 진격군이 2만안팎으로 누르하치의 기병위주의 6만 팔기군에게 3~4일만에 각개격파 당해.
⑥명 신종(만력제)의 30년간의 태업에 따른 국정마비는 명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불러와 국가재정ㆍ기강 등 멸망의 모든 징후를 보여줘.
⑦누르하치, 사르후전투의 승리로 북방의 최강자로 발돋움하고, 이후 몽골족을 복속시키는 등 중국을 침공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 조선 광해군, 여진의 발흥에 따른 대비 중 정권소외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으로 실각.

기사입력: 2017/11/14 [05:38]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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