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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사르후 전투, 여진이 명의 숨통을 조이다
파병지원 조선 강홍립 투항 … 인조반정 호란으로 이어져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15 [04:37]

[김쌤’s 한국사] = 사르후전투는 누르하치의 후금(건주여진)이 명을 공격하자 명-조선-해서여진의 연합군이 건주여진의 본거지를 공격하려다가 사르후 지역에서 후금군에 대패한 전투다. 누르하치의 각개 격파작전에 말려 명의 주력군이 패전하자, 연합군의 구성원으로 참가한 조선의 강홍립군은 후금의 기병에 밀려 이틀동안 포위되자 후금에 항복한다.

이 전투의 패배로 명은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지고, 강홍립의 투항은 훗날 인조반정의 불씨로 작용한다.

16세기 후반 중국 북동부의 여진족은 세력권에 따라 건주여진 5개부족, 해서여진 4개부족, 야인여진 4개부족 등이 서로 각축을 벌였다.


▲ 중국이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만리장성. 정작 명은 내부의 혼란으로 멸망한다.(무료 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사르후 전투는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고 세부적으로는 4개의 전투가 독립적으로 벌어졌다. 이 4회의 전투에서 명군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궤멸적 타격을 당해, 이후 멸망으로 이어진다.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명 신종(만력제)의 태업으로 나라꼴이 엉망이기는 했다.
 
 
01. 누르하치의 선제공격, 명의 정벌 실패
①임진왜란이라는 공백을 틈타 성장한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영명칸(英名汗)으로 즉위(1616년)하고, 명에 대해 ‘일곱개의 큰 원한’을 내세워 선전포고와 함께 명의 요동거점인 무순을 공격.
②명은 양호(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4로병진 작전을 수행한 장수)를 요동경략으로 임명(1619년), 여진 토벌에 투입.
③명군, 예산부족으로 군사의 결집이 지체되자, 양호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후금 북방지역에서 건주여진과 대립중인 해서여진의 예허와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 누르하치와 대립중인 예허는 전적으로 나서고, 조선은 임진왜란 때 받은 도움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지원(도원수 강홍립의 1만3000병).
④명의 10만군, 4개의 군단으로 나눠 누르하치의 본거지 허투알라(싱징, 赫圖阿砬)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1619년).
⑤총사령관 요동경락 양호는 예비병력과 함께 후방인 심양에서 대기하면서 전군을 총지휘.
  - 주력부대 두송의 서로군(좌익중로군, 무순로) 3만
  - 마림의 북로군(좌익북로군, 개원로) 2만은 주력 두송군과 사르후 부근에서 합류 예정.
  - 이여백의 남로군(우익중로군, 청하로) 2만5000
  - 유정+강홍립의 동로군(우익남로군, 관전로) 1만3000+1만3000

 
▲ 사르후전투현황. 명은 신생세력 후금에 대한 총반격을 위해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사로병진작전을 실시하지만, 지휘부의 손발이 맞지 않아 각개격파 당한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금은 중국을 지배한다.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02. 사르후 전투(3월1일~2일) - 명의 두송군 궤멸
①누르하치, 명의 4로군에 맞서 각개격파 위해 허투알라 북방 첫 공방 거점 사르후 산과 강 맞은 편의 쟈이휘안 산에서 명군 방어용 기지 축성.
②전공을 서두른 두송의 서로군은 강행군으로 사르후 근처에 도착하나, 합류하기로 한 북로군은 폭설로 진군이 늦어져 두송이 전사한 이후에야 도착.
③사르후와 자이피안(吉林崖)에서 후금군이 성을 쌓는 것을 본 두송의 서로군은 전황이 급박하다고 판단, 마림의 북로군을 기다리지 않고 2월29일 사르후 앞의 혼하를 건너 사르후 산에 공격 개시.
④병력이 우세했던 두송군은 사르후 산을 즉시 점령하고 2만5000의 병력 중 1만을 수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주력 1만5000군으로 쟈이피안 산 공격.
⑤허투알라에 있던 누르하치는 명군의 도착 소식에 즉각 주력군을 이끌고, 사르후에 진격해 사르후산 전투가 끝난 저녁무렵에야 사르후의 남쪽에 도착. 자이피안의 후금군도 병력 열세에 후퇴를 거듭, 후방의 키린하다에 웅거하고 있던 상황.
⑥누르하치, 자이피안을 공격중인 명군을 제쳐두고 팔기군의 병력 중 6기를 동원해 명군의 본거지인 사르후를 공략. 후금 팔기군 중 2기는 자이피안을 공격하는 명의 주력군 견제를 위해 대치.
⑦오랜 행군 끝에 사르후를 점령한 명군은 미처 정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둠을 틈탄 후금군의 기습에 궤멸적 타격. 명군은 후금군이 키린하다의 수비병력과 합류, 쟈이피안을 공격할 것으로 오판.
⑧자이피안 공격에 나선 명군은 주력부대였지만, 본거지인 사르후의 후방이 궤멸하자 동요. 사르후를 제압한 누르하치의 6기, 자이피안에 대기중이던 2기, 키린하다로 후퇴했던 후금군 수비대의 3면공격에 명의 두송이 이끄는 서로군 참패.
 
 
03. 상간하다 전투(3월2일~3일) - 마림과 반종안의 불화가 패전 자초
①사르후 북쪽에서 집결장소인 사르후로 향하던 마림의 북로군은 두송의 서로군 궤멸 소식에 진격을 멈추고 상간하다(?間崖)에서 참호를 설치(1619년 3월2일) 하는 등 후금군의 공격에 대비.
②누르하치의 후금군 본대가 고지를 점령해 높은 곳에서 명군의 참호를 공격하고, 명군은 대포를 응전하는 등 방어. 후금군 기마대 공격에 이어 팔기군이 지원하면서 난전 양상은 후금군에 유리하게 벌어지지만, 마림과 불화를 겪던 반종안은 마림의 본대에 구원부대를 보내지 않아 마림은 패주.
③누르하치는 마림을 격퇴한 후 즉각 반종안을 공격, 역시 궤멸시켜. 마림은 신중론자, 반종안은 급전주의자로 전략에 대한 불화가 비극을 초래.
④마림과 반종안의 패전 소식을 들은 예허 원군은 후금군과 전투를 포기하고 자국으로 철수.
 

04. 아부달리 전투(3월4일) - 유정과 강홍립의 패전
①두송과 마림의 패전 소식에 요동경락 양호, 서로군 이여백(이여송의 아우, 퇴역했지만 이 전투를 위해 복귀)과 동로군 유정에게 진격 중지 하달. 서서히 진군하던 이여백, 중지명령에 즉각 퇴각하나 급진 중이던 유정의 동로군은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
②유정과 조선연합군은 허투알라의 남쪽을 방어하는 후금 수비대를 격파(3월2일)하고 진격중. 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정은 120근(70kg?)의 칼을 자유자재로 써서 별호가 유대도(劉大刀)일 정도로 용력이 뛰어난 맹장.
③문제는 유정의 병력증원 요청을 양호가 거부, 유정의 부대는 수천군에 조선의 강홍립군을 포함 2만7000가량(유정은 강홍립에게 5000군을 빌려줄 것을 요청). 더욱이 명군은 대포 등 전투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
④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代善), 명과 조선의 연합군 아부달리에서 교전. 이어 홍타이지(8남), 누르하치의 부장 다르한 희야 등이 유정의 진지를 포위, 3면에서 공격 궤멸.
⑤강홍립의 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패전은 기정사실이고, 이후 조선에도 변란이 생길 것을 근심했다는 비변사의 기록.
 
 
05. 부차 전투(3월5일) - 강홍립군, 모래바람에 날려
①유정이 아부달리에서 패전할때, 조선 강홍립군과 명 유정군 후방부대는 자금 부족으로 출발이 늦어, 아부달리 남쪽 ‘부차’(富察 환런 만족 자치현)에 숙영. 유정을 격파한 다이샨과 홍타이지, 부차의 조선군-명군 진지 공격.
②조선의 강홍립군, 조총과 장창으로 급히 방어선 구축하고 후금과 교전하나, 미처 진영을 갖추지 못한 좌익이 돌파당한데 이어 강한 역풍으로 불이 꺼지고, 화약 연기에 시야를 빼앗겨 후금의 기병돌격에 패전.
③조선군 김응하 등이 전사하는 등 5000명만 남아 고립된 상태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군 이틀만에 후금의 항복 권유에 투항. 당시 강홍립군은 군량지원을 받지 못해 이미 기아상태로 사기 저하 상태.
④조선군은 조총부대 위주로, 명의 주력군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어서 제대로 된 군사편제를 갖추지 못한 상황. 더욱이 후금군과 교전을 벌인 부차지역은 평지여서 기병에게 유리하고, 목책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조선군은 지형적 열세에 몰린 상황.
⑤명의 주력군이 궤멸당한 상태에서 조선군도 투항하자 명군의 장교가 자살하는 등 동남로군은 소멸.

기사입력: 2017/11/15 [04:37]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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