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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인조 서인정권, 정묘호란(1627년 1월)
오랑캐라 무시했던 여진, 대규모 침공하자 조선 속수무책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16 [09:22]
[김쌤’s 한국사] = 광해군은 즉위(1608년)하자마자, 전후복구에 힘써 대동법(경기도만) 실시, 동의보감 출간(1610년 8월, 광해군2) 등 수습에 나선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비(1618년 1월, 광해군10), 도원수 강홍립의 후금 항복(1619년 3월, 광해군11) 등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지고 결국 인조반정(1623년 3월, 광해군)으로 실각한다.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오랑캐로 깔보던 여진이 나라를 세우고 명과의 전투에서 승리(사르후 전투)하는 등 강대국의 면모를 증명하지만, 대책없이 깔보기만 한다.
 
 
01. 정묘호란 이전 조선과 후금의 상황
①누르하치가 건국한 후금(1616년), 요동을 공격해 명의 요동도사 모문룡 패전. 모문룡 패잔병을 이끌고 조선의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1621, 광해군13). 조선은 후금에 대한 방비책의 하나로 모문룡을 은밀하게 지원.
②본격적인 명나라 공격을 앞둔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쳐서 배후의 위협요소를 없앨 필요. 당시 후금은 명과의 전쟁으로 은, 인삼, 모피 등을 식량으로 맞바꿀 수 있는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극심한 물자부족 상태.
③인조반정 다음해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1624년)일으키나 곧 진압.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은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됐다며, 후금에 조선 공략을 호소.
④사르후 전투에서는 승전했지만, 여전히 명의 요동방어가 굳건한 상태(명의 원숭환이 누르하치의 침공 격퇴)에서 후금의 조선 침공은 배후를 안정시키고 물자획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⑤아구타의 금은 송과의 전쟁을 통해 금ㆍ은ㆍ비단ㆍ여인 등 수많은 전리품 노획하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 후금도 아구타의 전례를 따라 일단 조선 침공.
 
 
02. 후금의 3만군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조선군
①후금,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군으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조선 침공(1627년 1월)
②후금군,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의주,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어 안주, 평산, 평양에 이어 황주 장악.
③후금군의 주력은 한양을 향해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 공격.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 등에서 후금군을 방어했으나 실패. 가도의 모문룡은 신미도(평북 선천군 남쪽 해상의 섬)로 패주. 모문룡의 가도주둔 병력은 패잔병 수준으로 제대로 된 훈련도 보급도 없는 민병대.
④조선, 도원수 장만에게 방어를 맡기지만 후금을 막아내지 못해 평산에서부터 후퇴 결국 전선은 개성까지 밀린 상황. 인조 등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
⑤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보급과 후방의 위협 때문에, 조선은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후금군이 먼저 강화를 요청.
⑥영변부사 남이흥, 정묘호란 발발에 안주성에서 후금군 방어하지만 준비부족과 병력열세로 패배하고 자결. 남이흥은 이괄의 난(1624년 1월~2월)때 도원수 장만 휘하에서 정충신과 함께 무공을 세워, 영변부사 부임했으나 시간이 촉박.
⑦정봉수는 평안도 철산 용골산성에서, 이립은 용천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켜 후금군에 심각한 타격.

 
▲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침입경로. 속수무책으로 밀린 정부군과 달리, 정봉수 이립 등의 의병이 맹활약했다. 그래픽=김영수.     ©경기도민뉴스

 
03. 후금-조선 정묘화약으로 전쟁 일단락
①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명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진행
②후금-조선, △화약 후 후금군 즉시 철병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 정묘조약 체결(3월3일)
③조선, 왕자가 아닌 종실(원창군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
④조선, 오랑캐라고 여긴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을 굴욕으로 생각. 후금, 조선이 명과 계속 가깝게 지내고 모문룡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한 것이 불만.
⑤후금, 내부의 물자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에 막대한 조공 요구, 부담에 지친 조선은 조공을 거절하며 배금조류 강해져.
⑥후금, 명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면서 조선에게 군신관계 강요하며 관계 악화.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작용.
 
■ 모문룡(1576~1629)

①요동총병관 이성량 휘하에서 활약. 후금의 요동공격에 패배, 패잔병을 이끌고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가도(5800평)에 주둔(1621년).
②모문룡, 가도에 둔전하며 주변의 섬들을 모아 연합세력 형성하고 차전차경(且戰且耕) 정책으로 민병대 수준의 사병 양성. 청군의 배후를 자주 습격해 청나라 진강수장(鎭江守將)을 패사시키는 등 무공을 세우기도.
③정묘호란때 후금의 공격에 신미도(평안북도 선천군 남쪽 해상에 있는 섬)로 쫓겨났으나, 이후 가도에 복귀해 사병을 양성하고 통관물품세를 매기는 등 횡포.
④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와 후금의 견제목적으로, 명도 후금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관직을 주고 활용했지만 해외천자를 자칭하고 군사적 실패가 이어지고 조선에 들어와 약탈하는 등 신망 잃어.
⑤명 요동경략 원숭환, 뤼순(旅順) 근처 쌍도(雙島)로 유인해 말썽만 일으키는 모문룡 제거(1629년). 이것이 나중 원숭환의 숙청으로 이어지고 결국 명은 오삼계의 내응으로 청(여진)이 북경에 무혈입성.


 
기사입력: 2017/11/16 [09:22]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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