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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치밀한 방어 대책없이 강경책만 쓰다가 자승자박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17 [08:51]
[김쌤’s 한국사] = 조선을 일차 침입한 후금은 대륙의 복잡한 정세 때문에 간단한 강화조약을 맺고 철군한다. 실상은 정묘호란(1627년) 이전 누르하치가 명의 산해관 외곽의 요새 영원성을 공략하지만 원숭환의 방어로 공략에 실패하면서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사르후 전투의 승리(1619년 3월)로 요동ㆍ요서 지역을 모두 석권한 누르하치 입장에서 영원성 공략 실패는 뼈아픈 일이었고, 이때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곧 사망하고 여섯째아들 홍타이지가 즉위한다. 명을 공략하기 이전, 배후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홍타이지는 원숭환과 부하가 방어하는 금주성과 영원성을 재차 공격(1627년 5월)하지만 또다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명과 후금 입장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인조반정(1623년 3월)은 전쟁의 향방을 돌릴 수 있는 변수 중의 하나였다. 광해군과 달리 인조와 서인정권은 배금정책으로 일관했으므로 모문룡 등과 연합하면 후금의 명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 명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임란을 겪고도 지배층의 정권욕 때문에 조선은 제대로 된 전비(戰備)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01. 병자호란의 배경
①조선, 정묘호란의 강화조약에 따라 압록강 북방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 개시(공식 무역장소)를 열고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과 필수품을 후금에 공급(1628년 인조6).
②후금, 명과의 교역중단 조치로 내부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후금은 식량 강탈, 병선 요구 등 조선에 경제적 압박.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 자행 등이 이어지며 조선내부에서 척화배금(斥和排金) 분위기 고조.
③후금, 정묘호란 때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바꾸고, 황금 1만냥, 전마 3000필, 정병 3만 등 무리한 세폐 요구.
④홍타이지, 황제에 즉위(태종)하고 인조비 한씨의 사망을 문상한다는 핑계를 대고 용골대ㆍ마부태 사신 파견(1636년 2월). 인조와 조선 조정의 냉대에 후금 사신 도망치다시피 귀국하면서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귀환.
⑤유문은 배금정책을 담고 있어 후금은 조선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아채고 재차 침공 결정. 이해 4월 후금을 ‘청’으로 개칭. 태종의 즉위식 거행하며 조선에 사신파견 요구. 청에 사신으로 간 조선 사신은 배례도 않고 국서도 전달하지 않는 등 불손한 태도.
⑥청은 정묘호란때 왕자가 아닌 종친을 보낸 것 등 사죄를 요구하지만 조선은 청의 요구를 묵살. 심양(瀋陽)에 온 조선 사신에게 청은 왕자, 대신, 척화론자를 붙잡아 보내라는 최후통첩(1636년 11월)에 조선은 또다시 묵살.
 
▲ 병자호란 침공 현황.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02. 청태종, 10만대군으로 조선 친정
①청태종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대군을 심양에 모아 조선 친정(1636년 12월2일). 압록강 도하(12월9일) 청군, 임경업의 백마산성을 지나쳐 서울에 육박. 청군의 압록강 도하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월12일.
②청군의 평양 도착(12월13일)에 이어 개성유수, 청군이 이미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12월14일). 인조, 그날밤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의 마부태가 홍제원을 점령하고 강화도로 가는 도주로 차단 소식에 도주 실패.
③이조판서 최명길,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며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12월13일).
④청태종, 1637년 1월1일 남한산성 밑 탄천(송파)에 20만군사로 남한산성 포위. 각지의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지만, 중도에 모두 청군에게 격파 당해. 47일 버티던 인조, 청태종에게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조아려서 모두 삼배를 하는 동안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로 항복(삼전도의 굴욕 1637년 1월30일).
⑤인조의 항복은 남한산성의 식량부족에 따른 사기저하와 종친이 피난했던 강화도의 함락(1월21일)에 따른 것.
 
▲ 서울 삼전도비(사적 제101호 1963년 1월21일 지정).     © 경기도민뉴스

03. 국왕 항복 초유의 사태 사회 극심한 혼란
①청, 조선의 세자ㆍ빈궁ㆍ봉림대군(뒤의 효종)을 인질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ㆍ윤집ㆍ홍익한을 잡아 심양으로 귀환.
②조선, 전쟁종료 후 먼저 장신(강화유수 겸 주사대장)이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자살처리. 강화수비 총책임자 검찰사 김경징 사사.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 이민구 영변에 위리안치.
③청, 조선의 사대부 등 수만명(50만명이라는 기록도) 포로로 잡아가 돈을 받고 방면. 속가(贖價)는 1명당 25~30냥에서 150냥~250냥 수준. 속환 사녀(士女)를 환향녀라 해 이혼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
④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10년동안 심양에서 인질로 잡혀있다가 명이 멸망(1644년)한 이후인 1645년(인조 23)에 귀국.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 재야인사 발탁ㆍ군비 확장 등 북벌을 준비하지만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적 구호에 그쳐.
기사입력: 2017/11/17 [08:51]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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