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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인조반정(1623년), 호란을 불러오다
집권초 역모설 이어 이괄의 반란으로 여전히 혼란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20 [08:36]
[김쌤’s 한국사] = 임란을 거치며 전쟁에서 활약한 의병장 출신들을 기용해 지지기반으로 삼은 광해군은 상대적으로 지지기반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북인은 내부적 결속도 약한 편이어서, 곧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한다.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위협받던 광해군은 연이은 옥사(역모)로 지지층의 이반(폐모살제)을 불러온다. 여기에 명의 요청을 받아 사르후 전투에 참전한 강홍립 등이 투항하자 재조지은(거의 망할 위기에 처한 왕조를 살려놓은 은혜)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이첨, 후궁 김개시 등 ‘인의 장막’에 갇혀있던 광해군은 거듭된 반정 움직임이 있다는 상소에도 아랑곳 않고 연회를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한다.
 
 
01. 정권 소외 서인세력이 반정 주도
①계축옥사(칠서의 옥)로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김유ㆍ이귀ㆍ이괄ㆍ최명길 등 서인이 정권소외 사림의 불만을 이용해 정변 도모.
②광해군의 조카 능양군과 가까웠던 이서ㆍ신경진ㆍ구굉ㆍ구인후 등 정변을 모의하고 준비 시작(1620년). 여기에 김류ㆍ이귀ㆍ최명길ㆍ장유ㆍ심기원ㆍ김자점 등이 모의에 참여하며 본격 추진.
③반정세력, 이귀의 평산부사로 임명(1622, 광해군14)을 계기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 발각. 대간(臺諫)이 이귀를 잡아 문초할 것을 광해군에 주청했으나 심기원ㆍ김자점이 후궁 김개시에게 뇌물을 써 사건을 흐지부지 무마.
④반정세력은 장단부사 이서가 덕진(德津)에 산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게 되자,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며 정변을 준비.
⑤반정세력, 1623년 음3월12일 거사일로 정하고 훈련대장 이흥립을 포섭. 이이반의 고변으로 정변계획 발각되자 박승종 등이 추국청을 설치해 관련자 체포하려 했으나 후궁 김개시와 연회를 벌이던 광해군이 재가하지 않았고, 붙잡았던 이흥립마저 방면.
⑥이이반의 고변으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정변을 추진. 초관 이항이 돈화문을 열어 반정세력을 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변 성공.

▲ 금남군 정충신 영정각(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3호, 1984년 4월1일 지정). 정충신(1576~1636). 17살의 나이로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 휘하에서 활약. 무과에 급제하고 이괄의 난을 수습(1624, 인조2)해 진무공신 책봉. 병자호란 발발 전 병사.     © 경기도민뉴스
 
 
02. 집권 서인세력, 초반부터 역모설 등 시달려
①반정세력, 서궁 유폐 인목대비 존호 복권하고 권위를 빌어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 이후 대북파 이이첨ㆍ정인홍 등 수십명 처형, 200여명 유배. 정변 이후 서인과 남인의 활발한 진출로 붕당정치 본격화.
②인조즉위 7월 유응경의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는 고변에 국문 끝에 아들 유약과 함께 사형. 유몽인은 폐모론 등에 가담하지 않고 도성안에 출입을 끊었던 중도파지만,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끝내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여.
③10월에는 황현과 이유림이 흥안군을 옹립한다는 역모 고변. 인조, 흥안군은 결국 이괄의 난때 이괄의 군중으로 들어가 왕에 추대받으나 반란 진압으로 처형.
④이괄의 난(1624년 1월)을 진압하지만, 반정의 주도세력 서인은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한 왕권의 제약과 명분ㆍ의리를 내세워 친명배금정책으로 전환.
⑤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와 임진왜란 이후 겨우 수습하던 조선은 또 다시 정치경제사회기반이 뒤흔들리는 막대한 피해.
 
 
이괄(1587~1624)

①함경도 병마절도사 부임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해 작전지휘를 맡아 반정 성공(1622년 3월, 광해군14). 후금과의 분쟁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영변에서 성책을 쌓고 국경 경비.
②반정 당시 군사를 통솔하는 김유가 계획누설을 핑계대며 군사지휘를 망설이자, 이괄이 나서 군사 지휘해 반정성공 시켜.
③이괄의 아들 전(?)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에 대해 개탄한 것이 꼬투리 잡혀 대대적 옥사로 발전(1624년 1월17일). 이괄, 자신의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 고덕률ㆍ심대림, 선전관 김지수, 중사 김천림 등을 죽이고 반란(1월24일).
④이괄, 1만2000군으로 서울로 진격. 서울에 입성 이틀만에 장만에게 참패당하고, 이천으로 패주했으나 부하 장수 기익헌 등에게 목이 잘려 평정(2월 14일).
 
 
 
김개시(?~1623)

①선조 때부터의 상궁으로, 미모는 아니나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해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농단. 매관매직 등 해독이 커, 윤선도ㆍ이회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논핵했으나, 도리어 유배.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잡혀 참수(1623 광해군15).
②이긍익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천예(賤隸)의 딸이라고 기록해, 노비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
③동궁(세자) 소속의 궁녀로 입궐해 청년 광해군과 인연. 글을 알고 문서 처리에 능해 선조의 나인으로 발탁된 후, 다시 광해군 즉위후 대전의 지밀나인으로 승격.
④광해군 정권 말기 수차례에 걸쳐서 반정쿠테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김개시가 거짓상소라고 치부하며 광해군을 안심시켰다는 설. 인조반정 직전에도 김개시가 반정군의 뇌물을 받고 광해군과 함께 주연(酒宴)을 즐기며 반정 성공을 유도??




기사입력: 2017/11/20 [08:36]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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