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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자멸의 길로 치닫는 명(明)
조선, 동북아 석권 후금의 저력 간파 못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29 [08:24]
[김쌤’s 한국사] = 사르후 전투 패배의 여파는 컸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만주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예허부도 사르후 전투 직후 완전 복속(1619년8월)시킨다. 이후 후금은 요서지역의 요충지인 개원, 심양, 요양을 잇달아 빼앗고 동북지역의 최강자로 떠오른다.

명의 조정은 환관 중심의 엄당세력과 사대부 중심의 동림당 세력의 끝없는 갈등이 국정혼란으로 이어져 국경을 방어하던 웅정필(1569년~1625년), 원숭환(1584년~1630년)같은 인재를 제거한다. 명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본 젊은 무장들은 후금에 투항하고 이는 그대로 명의 위기로 이어진다.

조선이 믿고 의지하던 명이 자멸의 길로 치달을 때, 조선도 인조반정(1623년)으로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01. 웅정필, 사르후 패전 수습하며 방어작전 전환
①명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양호를 파면하고, 웅정필을 감찰어사 겸 대리사승으로 임명(1619)해 요동 방어에 투입. 웅정필은 요양성에 부임하자마자 사르후 전투에서 도주했던 유우절ㆍ왕첩ㆍ문정 세장수를 공개처형하며 군율 확립.
②산해관을 맡기 전 웅정필은 신종(만력제 1563년~1620년)에게서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발목 잡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싸우지 않고 방어에만 치중하는 전략 구사. 18만 대군을 조련한 웅정필은 병력을 요충지에 배치하고 연락망을 만들어 방어 시스템 구축.
③작은 공격은 방어력을 이용해서 막아내고 큰 공격은 서로 구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웅정필은 심양, 요양을 중심으로 산해관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방어에만 전념하자 누르하치도 1년동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관망.
④방어는 했지만, 신종(만력제)이 사망하고 눈에 띄는 전공이 없자 엄당세력인 고조ㆍ요종문 등이 ‘웅정필이 싸우려 하지 않고, 변방에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한다’고 고발. 웅정필, 요동경략에서 사임하고 원응태가 후임(1621).
 
02. 명 지도부, 웅정필 파면…후임 원응태 연패
①후임 원응태 부임할 때 몽골지역에 발생한 심각한 기근으로 몽골족이 명으로 유입. 원응태, 몽골유이민 구원하지 않으면 후금의 병력으로 될 것을 염려해 몽골유이민 받아들여 요양과 심양에 분산 배치. 당시 상당수의 몽골족은 후금과 친교 상황.
②누르하치, 웅정필의 사임을 계기로 후금의 병력 총동원 심양성 공략(1621년 3월12일, 광해군13). 당시 심양성은 웅정필이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한 곳이지만, 총병 하세현이 성밖에서 싸우다가 휘하 우세공 하국경 등 장수급 30명과 7만군 전멸.
③심양성은 10겹구덩이, 1차해자, 난마장(기병의 방어벽), 2차해자에 이어 성벽에 대포를 설치하는 등 명에서도 방어에 전력을 기울인 곳. 하세현은 적을 경시하고 술을 마신 상태에서 무리한 진공으로 자멸(3월13일).
④천절(사천과 절강)총병 진책, 2만병을 이끌고 심양성 포위를 뚫기 위해 지원에 나서지만 심양성이 이미 함락해 혼하를 건너 영책을 세우고 결전 대비. 누르하치와 일진일퇴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멸.
⑤요동경략 원응태, 심양성 지원에 나섰다가 함락 소식에 요양성에 들어가 누르하치의 공격을 방어하지만, 역시 성안의 밀정이 불을 지르며 내응하는 바람에 3만군 전멸(3월18일).
⑥명의 잇단 패전으로 요동의 중심인 심양ㆍ요양이 무너지면서, 50여개의 요새와 70여개 성이 후금으로 넘어가 명의 요동(요하동쪽) 영향력 소멸. 오히려 후금은 수도를 심양으로 천도.
⑦다급해진 명 조정, 웅정필을 다시 우부도어사 겸 요동경략으로 임명(1621년 4월)하며 정략적 판단에 따라 요동순무 왕화정(환관파)을 요동순무로 붙여 파견. 결국 왕화정의 무리한 공세가 파멸의 전주곡.
 
03. 무능한 정권, 결국 웅정필을 처형
①복귀한 웅정필은 축소된 방어선 광녕을 중심으로 군사를 재정비하고 방어를 굳건히 하면서 톈진과 산둥의 수군과 조선의 도움을 받아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제시.
②하급자인 왕화정(환관 위충현이 만든 엄당의 지원을 받는)이 웅정필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한 상태. 왕화정, 모문룡에게 요동의 유민들을 모아 요동을 회복하라는 명령(1621년 5월)하고 모문룡은 200수군으로 후금의 배후 요충지 습격 승리(모문룡의 거둔 유일한 승전보).
③왕화정, 요하 지역에 6만군을 배치해 일거에 승리를 거두자는 주장만 고집. 누르하치, 웅정필과 왕화정의 갈등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서로 진격(1622년 1월).
④누르하치, 광녕의 전초기지 격인 서평을 공격해 지휘관 나일관 등 1만군 중 3000명 전사. 침공 보고를 받은 왕화정, 휘하 손득공과 3만군으로 서평 구원 조치. 손득공, 후금군과 만나자마자 ‘패배했다’며 달아나자 명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
⑤후금과 내통한 손득공은 광녕으로 돌아와 ‘후금군이 가까이 왔다’고 혼란 부추기고, 업무 중이던 왕화정은 부하장수가 억지로 말을 태워 서쪽으로 피신시키는 사이에 누르하치는 손득공의 인도에 따라 광녕성에 무혈입성.
⑥명은 20여일의 전투 끝에 후금에게 요동지역 완벽하게 넘겨 줘. 명 조정, 패전처리를 놓고 갑론을박 끝에 환관파가 승리하면서 왕화정이 아닌 웅정필 처형(1625년, 왕화정은 1632년 처형).
⑦왕화정은 후금-명과의 최초의 전투에서 무순을 넘기고 항복한 이영방에게 내통을 권유하고, 조선 가도를 근거지로 해적질을 일삼던 모문룡에게 후금의 배후 공격 등 지시. 또 몽골의 40만대군이 후금과 결전할 것이라는 등의 혼자만의 필살대책을 제시.
⑧명, 왕화정의 패전으로 요동을 완벽하게 잃고 방어선을 산해관으로 후퇴ㆍ축소.

04. 명의 원숭환, 최초로 후금 격퇴
①원숭환(1584년~1630년), 35살에 진사시(문과)합격(1619년, 사르후전투에서 패전). 이후 병부 직방주사 임명(1622년). 산해관 200리밖에 있는 영원성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고 요동방어 자원.
②요동부임 원숭환, 영원성 보수ㆍ개축으로 요새로 만들고 네덜란드의 최신식 홍이포 들여와 설치하며 휘하 총병 만계, 참장 조대수와 함께 2만군사 조련. 군사조련과 영원성 완성에 원숭환, 1만4000군으로 요서일대 순찰(1624년)하지만, 삼엄한 기치창검과 군율에 눌려 후금은 공격 엄두도 못내.
③원숭환, 대학사 손승종에게 금주(錦州), 송산(松山), 대릉하(大陵河), 소릉하(小凌河) 등의 요새화와 병력 배치 건의해 요서방어선 구축.
④명 조정 실권자 환관 위충현(엄당)이 손승종을 몰아내고 고제를 산해관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 고제, 원숭환과 손승종이 완성한 요서 방어선 포기하고 산해관으로 방어선 후퇴 결정. 원숭환의 강력한 반대에 영원성을 제외한 다른 요새의 병력과 식량을 모조리 산해관 안으로 이동.
⑤고제의 방어선 후퇴를 호기로 잡은 누르하치, 10만군으로 영원성 공략(1626년 1월)하지만 원숭환이 격퇴. 후금군의 전사자 2000명 이상.
⑥누르하치, “짐이 25살부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한탄. 이후 심리적 스트레스 등으로 사망(1626년 8월11일)하고 홍타이지가 즉위.
⑦명 실권자 환관 위충현(요동 방어선 붕괴와 웅정필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 원숭환의 대승을 기뻐하며 고제를 해임하고 원숭환을 요서 방어의 총책임자로 승진시키고 풍족한 지원. 이 때문에 원숭환은 엄당의 무리로 몰려 훗날 반역죄로 극형.
⑧누르하치, 사망에 앞서 애첩 안바푸신(37 예친왕 도르곤의 생모)에게 자결 명령. 12살에 누르하치에게 시집온 안바푸신은 미모지만 질투가 심해 누르하치는 왕권안정을 위해 자결 명령.

05. 명, 원숭환을 모반죄로 처형하며 자멸의 길 폭주
①홍타이지, 부친 누르하치의 설욕과 물자부족 타개를 위해 배후 위협요소인 조선을 침공(정묘호란 1627년 1월)해 소기의 목적 달성하고 금주성 공략.
②홍타이지, 대릉하 소릉하 등 작은 요새 점령한 후 금주성 포위 공격. 원숭환 휘하 조솔교의 3만병력, 충분한 식량과 홍이포 대량 배치해 홍타이지 방어. 홍타이지, 목표를 바꿔 원숭환의 영원성 공략하다 실패하자 다시 금주성 공략하는 등 우왕좌왕.
③패전만하던 명(실권자 위충현)은 원숭환의 승전보에 기뻐하며 원숭환의 요서방어선 구축에 전폭적인 지원. 이때 천계제 사망하고 동생 숭정제 즉위하며, 직후 위충현 처형(자살 조치). 반대당, 원숭환이 위충현으로부터 국방비 받은 것을 위충현의 일당(엄당)으로 몰아 해임하고 조정으로 소환.
④후금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원숭환밖에 없다는 조정 대소신하들의 줄기찬 상소에 원숭환 요서방어 전진기지 영원성 복귀(1628). 원숭환, 숭정제에게 ‘5년안에 요동 평정 장담’. 복귀한 원숭환은 명 수군 좌도독 모문룡을 해적질ㆍ조선 가도에서의 양민 학살 등의 이유로 참형(1629년 6월5일).
⑤홍타이지, 아버지 누르하치에 이어 또다시 원숭환에게 패전하자 장성을 우회해 북경을 공격하기로 작전 방침 변경. 후금이 장성을 우회해 북경까지 공략하자 원숭환, 병력을 이끌고 북경성 밖에서 후금군을 격파하던 중 숭정제가 모반혐의로 능지처참형(1630년 9월22일 숭정3)
⑥휘하 조대수 등, 원숭환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1631년 10월28일). 명은 후임으로 오삼계를 산해관에 파견하지만, 오삼계는 스스로 후금에 투항.

기사입력: 2017/11/29 [08:2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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