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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관직-당파 연결…팔도가 당쟁의 폐해
이익ㆍ이건창 등 ‘경제적 이득’을 분당의 원인으로 지목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30 [09:16]
[김쌤’s 한국사] = 조선시대 후기 이후는 당쟁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이해해도 무리가 아니다. 붕당정치의 순기능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성리학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모략하는 양상은 이중환이 택리지 복거총론에서 ‘사대부가 살고 있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지적한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중환은 이어 벼슬살이하는 사대부는 당파에 속해있었고, 집권과 실각을 거치며 그들의 고향집과 친인척도 자연스레 ‘역모’에 연관되다보니, 조선팔도의 인심마저 사나워졌다고 한탄한다. 심지어 친인척사이에서도 한번 당이 갈라지면 말도하지 않는 풍조가 생겼다면서 천륜도 비껴갔다고 비판했다.

▲ 인천 강화군 화도면의 이건창 선생(1852~1898) 생가(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 1995년 3월1일 지정). 당쟁의 원인을 분석한 <당의통략> 저술.(사진=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오죽하면 임진왜란에 대한 보고도 당파에 따라 달랐고, 전란 도중에 상승불패장군 이순신(당색이 드러나지 않지만, 조정의 관리들은 류성룡과의 친분 때문에 남인 계열로 여겼다)을 파직하고 백의종군시키기까지 한다.

사도세자빈 홍씨는 남편의 죽음을 기록한 <한중록>에서 풍산홍씨가문과 아버지 홍봉한을 걱정한다. 뒤를 이어 나타난 세도정치에서는 국가보다 가문을 우선시하는 모습의 대비도 나타난다. 백성과 나라보다 당파와 가문을 중시하던 부류들이 국정을 담당했던 조선이 세계화에 뒤진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당쟁의 폐해는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 주장은 노론계열의 조완구ㆍ조소앙, 소론계열의 이시영ㆍ신익희, 남인계열의 이동녕ㆍ홍진, 북인계열의 엄항섭 등을 꼽는다.
 

01. 도덕적 개인이 타인 비판하며 파당 나뉘어
①조선은 대명률에 의해 붕당정치 금지가 불문율(경국대전은 붕당에 대한 언급이 없음). 조광조의 사사 이유 중 하나가 ‘편을 나누어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
②이조전랑은 전임이 추천하는 직위인데, 한번 잡기만 하면 같은 당 소속인물에게만 대물림 가능한 것이 비극의 원인.영조는 결국 이조전랑의 추천권을 없앴고, 정조가 잠깐 추천권을 부활했다가 결국은 정조 스스로 다시 폐지.
③이익(성호사설), 이중환(택리지), 이건창(당의통략) 등에서 당쟁의 원인으로 경제적 이득을 지적. 일본식민사관도 경제생산력 부문을 언급하며 이것이 누적돼 조선의 민족성이 분란을 좋아한다고 폄하하지만 근본적 이유는 역시 경제적 이득을 언급.
④양란 이후 전후복구로 토지결수는 150만결(세종 170만결)로 생산력을 어느정도 회복하지만, 이어진 경신대기근(현종~숙종) 등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자 관직이 아니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대부 급증. 영정조 이후 산업생산 활동 늘어나자, 권력층은 또 다시 수탈에 몰두해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관직을 방패막으로 둘러야할 형편.
⑤임란을 거치며 급증한 양인(양반 포함), 별과 등의 과거합격자, 속오군 등으로 인한 노비감소로 인한 양반관료의 경제적 곤궁, 이에 따르지 못한 후진적 경제구조 등은 관직(공무원)에만 집착하도록 사회를 유도 또는 강요.
⑥특히 노비문제는 조선 건국초부터 예민했던 사안 중의 하나인데, 모든 경제활동의 생산 말단은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하던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조선후기에서 한때 노비가 전 인구의 50%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⑦주자의 성리학은 엄격한 자기수양을 강조하는데, 개인적 도덕의 완성자가 타인을 자신과 같은 도덕적 완성자가 아닌 것으로 비판하는 순간, 선의의 신념이 사회적 악으로 기능. 이는 유럽의 종교분쟁에서도 같은 상황.
⑧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한 조선은 대체적으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프레임에서 국정을 수행하며, 국왕 자신도 때로는 붕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등 현실적 한계.
⑨성리학의 기본이념인 ‘이’와 ‘기’의 이분법 자체가 사람을 사농공상의 계층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군자와 소인으로 편가르는 역할도.


02. 사림, 명종때 외척 윤원형의 폭거에 뿌리깊은 반감
①반정으로 연산군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대윤)사이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소윤)사이에서 명종을 출산.
②인종은 즉위하자마자 재위 8개월만에 죽고(문정왕후측에서 독살했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다), 명종(1534~1567, 재위 1545~1567)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생모 문정왕후는 수렴청정하고, 친동생 윤원형이 득세하며 세도.
③앞서 중종때,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놓고 사림과 훈구가 대립한 기묘사화(1519년, 중종14)에 이어 윤원형 일파는 또 다시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로 대윤파를 제거하고 양재역 벽서사건(1547)으로 잔당 제거.
④외삼촌 윤원형이 생모 문정왕후와 함께 횡포를 부리자 견디다 못한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와 심의겸의 외삼촌인 이량(1519~1563)을 등용하지만, 이량은 이준경을 내쫓기 위해 자산의 당파를 만드는 등 정치문란 자행.
⑤조정이 어지러우니 지방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그 틈을 타 을묘왜변 발생(1555). 또 임꺽정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발호(1559~1562)하는 등 국가 전체가 어지러운 상태.
⑥문정왕후와 소윤의 득세는 결국 문정왕후의 사망(1565)으로 일단락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명종도 곧 사망(1567).
 

03. 선조, 사림세력 등용하며 분당의 계기 만들어져
①인순왕후, 선조가 16살에 즉위하지만 반년만에 수렴청정 걷고 선조 친정체제로 전환. 선조, 사림세력 등용하며 새로운 정치사조 조성.
②명종의 22년 치세동안 외척 윤원형 세력에게 당한 사림들은 외척이라면 이를 가는 상황이었지만,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사림을 제거하려던 이량을 탄핵(평북 강계로 유배)해 사림의 보호자라는 명성.
③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이조전랑으로 천거하자, 이조참의였던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1572).
④김효원, 조정기의 추천으로 결국 고위관직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조전랑 취임(1574). 이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받자 ‘전랑이 어찌 외척의 소유물이냐’며 반대(1575)하자 심의겸도 ‘외척이 원흉(윤원형)의 문객에게 지겠느냐’며 반목해 갈등 폭발.
⑤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해 윤원형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심의겸은 공무로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다가 김효원(또는 그의 친구)이 있는 것을 보고 문명있는 선비가 도리를 잃었다며 비난.
⑥앞서 이준경의 유차(1572)를 공격한 세력이 사림이었다는 것은, 사림이 이미 여론을 중시하고 수기치인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도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일 수도. 이준경은 사림의 정신적 지주 조광조를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데 앞장섰던 원로(1568, 선조1).
⑦조선 중기 이후, ‘과거 합격=성리학적 수양의 완성=도덕적 우월=관직=권력’이라는 사림의 패턴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전조가 바로 이준경 유차 사건.

기사입력: 2017/11/30 [09:16]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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