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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명, 기사년의 변(己巳之變 기사만족대겁략)
당쟁으로 원숭환 처형…청의 대규모 약탈로 이자성의 난 발발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2/01 [05:58]
[김쌤’s 한국사] = 명의 멸망과정을 보면 조선과 묘한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명은 환관 위충현 일파인 엄당과 사림위주의 동림당으로 분열돼 당쟁을 벌이고 있었다. 어느 파가 우세한지에 따라 국방의 책임자를 입맛대로 바꾸곤 했는데, 요동방어사령관 웅정필을 바꿨다가 패전한 이후 다시 기용한다. 재기용하고서도, 실권을 주지 않아 다시 패전하게 만든 후 실질적인 책임자는 방면하고 애꿎은 웅정필을 처형한다.

이후 원숭환에게도 웅정필과 같은 일을 반복한다. 웅정필이 누르하치로 하여금 아예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원숭환보다 명장일수도 있다. 원숭환은 이미 요동지방을 상실한 명의 유일한 방어책임자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라는 부자영웅과 맞서 두 번이나 승전한 장군인데도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01. 만주족, 원숭환 회피전략으로 북경 침략
①홍타이지, 금주성ㆍ영원성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원숭환이 지키는 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침공경로를 변경하는 전략 수정.
②홍타이지,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일대 우회해 몽골족의 영역을 지나 하북 북방의 용정관. 대안구(大安口)ㆍ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침입하기로 결정.
③전쟁의 목적을 정복을 통한 영토 획득이 아니라 물자 획득을 목적으로 변경. 당시 후금은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생산력 부족으로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상태.
④홍타이지는 사촌 아우인 지르갈랑에게 영원성ㆍ금주성 공격 지시, 원숭환의 시선을 요서 일대에 묶어두고 10만대군으로 용정관(龍井關), 대안구(大安口)ㆍ희봉구(喜峰口)를 넘어 북경으로 침공(1629년 10월2일).
⑤홍타이지, 대대적인 약탈과 함께 북경 일대 초토화하고 북경성 밖까지 도달(10월26일). 북경성민들, 원숭환이 길을 내주지 않으면 후금이 침공할 수 없는데 나타난 것은 ‘원숭환이 길을 내준 것’ 유언비어 유포.
 
 
02. 원숭환, 수성에 이어 야전에서 최초로 청군 격퇴
▲ 명 최후의 장군 원숭환의 초상. 명은 유능한 장군을 스스로 제거하며 멸망으로 접어들고, 그 여파는 조선에 미친다 (사진=위키디피아).     © 경기도민뉴스
①원숭환, 동원 가능한 전 병력 이끌고 북경으로 진공. 산해관에 도착하자 준화성(遵化城)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참장 조솔교에게 4000군을 나눠주며 준화성 구원. 왕원아가 사수하던 준화성은 조솔교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 조솔교의 지원군도 후금의 복병에게 전멸.
②후금군, 함락 준화성에서 대학살 자행하고 이 사실이 북경으로 전해지며 북경성민의 공포감 극대화, 원숭환에 대한 원망도 커져.
③원숭환 9000군사, 북경 광거문 도착(11월17일). 부총병 주문욱의 일단 북경성안으로 들어가 병사들의 휴식 제안물리치고 야영. 다음날 광거문 밖에서 원숭환 9000군사, 후금군과 10차례 이상 싸워 후금군 격퇴(성안에서의 농성방어전이 아닌 야전에서 승리한 것은 원숭환이 처음).
④원숭환, 병사들이 오랜 행군 전투 장기간의 노숙으로 지쳤으므로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하지만 숭정제 허락하지 않아(11월23일).
⑤북경의 겨울 날씨에서 성밖에서 노숙하던 원숭환의 9000군사, 북경 좌안문 부근에서 후금군 격퇴(11월27일). 홍타이지, 원숭환 때문인지 철군하며 곳곳에서 엄청난 약탈 자행. 후금군 1명에게 우마한마리씩 돌아갈 정도의 물자 노획과 함께 수만명(노동력)의 포로를 확보했다는 기록도.
⑥이후 후금은 명이 멸망할 때까지 하북, 산서의 장성 루트를 통해 십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약탈 감행. 명 황하 이북의 약탈은 명 재정의 붕괴를 부르고 때마침 찾아온 기근은 농민반란을 촉발(이자성 등).
 

03. 홍타이지의 반간계 등으로 원숭환은 모반혐의 풀지 못하고, 결국 처형
①실록(1630년 인조8년 2월27일 기사)은 후금에 사신으로 갔던 박난영이 “골대가 좌우를 물리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원공(원숭환)이 과연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반간계(反間計)를 쓰는 말이 분명합니다”라는 기록.
②외국인인 조선사신도 듣자마자 의심하는 반간계인데도, 정작 명에서는 숭정제의 의심병, 엄당의 끝없는 모함(모문룡은 엄당의 일파였고,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서 해적질로 보내준 뇌물은 엄청난 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③숭정제, 후금이 북경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숭환을 군량에 관해 의논할 것이 있다며 황궁으로 소환(1629년 12월1일).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으니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은 원숭환은 휘하 총병 만계(滿桂)와 부장 흑운룡(黑雲龍)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황성으로 입궁(후금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 성문을 열 수 없다며, 큰 바구니를 내려보내 황궁으로 입궁).
④숭정제, 원숭환에게 모반 등을 추궁하며 구금. 원숭환 휘하 총병 만계와 만계의 부장 흑운룡에게는 승진과 함께 상훈. 원숭환 휘하 조대수는 원숭환 구금 소식에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을 넘어 도주. 조대수는 후금에 투항하려 했으나, 숭정제의 명령으로 원숭환이 옥중에서 보낸 서신과 손승종의 만류로 일단 귀환.
⑤원숭환 구금에 후금군, 북경성 포위하자 숭정제는 만계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 만계는 전력부족으로 농성을 건의했지만 숭정제, 나가 싸울 것을 명령. 만계, 휘하 흑운룡ㆍ마등운ㆍ손조수 등과 북경성 영정문밖에서 설진(12월15일)하고 다음날 결전에서 대패.
⑥원숭환을 살리려는 동림당과 죽이려는 엄당의 격렬한 갈등 속에 숭정제, 황제를 속인 죄와 모반의 죄로 서시 거리에서 책형(1630년 8월16일).
⑦원숭환의 처형 이후 명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인재는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이자성 등의 농민반란으로 명 멸망(1644). 이자성이 산해관으로 진격해오자, 오삼계는 청과 동맹을 맺고 북경으로 진격.
⑧당시 청은 이자성에 대한 복수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워.
 
■ 명 말기의 3안

①장남 주상락(1582~1620)을 제치고 정귀비의 소생 3남 주상순(1586~1641)을 황태자로 세우려했던 명 신종(만력제) 사망(1620년). 장남 주상락, 광종 즉위하나 29일만에 급사(홍환안).

②명 내부 3안(정격안, 홍환안, 이궁안)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후금군, 명군을 만주에서 완전히 축출(1621년 3월)하고, 선양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아(1621년 5월).

△정격안(挺擊案 1615 5월, 만력43)=장차라는 남자가 황태자 주상락 거처 자경궁에 난입, 수문태감에게 위해를 가한 사건. 암살사건으로 커지면서, 사건처리를 놓고 명의 조정 분열.

△홍환안(红丸案 1620년 8월 태창원년)=신종의 사망으로 즉위한 광종(주상락)이 설사로 오락가락한 상태에서 이가작이 바친 선단(红丸)을 먹고 급사하자, 처리를 두고 또다시 분열.

△이궁안(移宫案 1620년 태창원년)=광종(주상락)이 29일만에 급사하자 뒤를 이은 희종(주유교, 재위 1620~1627)이 16살에 즉위. 광종의 총애를 받던 선시(選侍, 후궁의 계급) 이씨가 건청궁에 머물며 정권을 농단하려하자 동림당 중심의 관료들이 반발하면서 환관세력과 갈등.
 
 
기사입력: 2017/12/01 [05:58]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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