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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칠천량패전이 정유재란의 시작
직산전투ㆍ명량해전으로 왜의 수륙병진 전략 좌절시켜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2/06 [07:34]
[김쌤’s 한국사] = 강화회담 결렬로 도요토미는 1597년 1월부터 대규모 병력을 부산으로 이동하며 군비를 갖춰, 7월쯤에는 총 14만 병력으로 경상ㆍ전라 지역을 석권한다. 왜군은 충청도까지 장악하고 계속 북진, 경기지역으로 진공하려하자, 조선은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평양 주둔 명군 주력부대는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경기도 남쪽 직산지역(충남 천안)에서 전투를 벌인다.
 
 
01. 칠천량해전(1597년 7월14일~16일, 선조30)
칠천량해전의 패전은 왜군이 그토록 원하던 수륙병진 작전(병참ㆍ보급선 확보)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자에 따라서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왜군은 1597년 1월부터 7월까지 병력을 증원했지만 부산포에 집결, 본격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칠천량에서의 승전으로 병참보급선을 확보한 왜군은 전선(戰線)을 하삼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대, 우키타(宇喜多秀家)ㆍ고니시(小西行長)ㆍ모리(毛利秀元) 등이 쉽게 남원과 진주로 침범한다.
①왜, 제해권 장악 위해 모략으로 이순신 제거(2월6일 파직, 2월26일 압송). 후임 원균 부임 당시 한산도수영의 전력은 전함 포함 선박 134척, 수군 1만7000,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 등.
②원균,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을 초토화하겠다는 호언장담과 달리 이순신이 만든 군사작전회의실 운주당(運籌堂)에 기생을 불러다 음주가무 등 군기문란 자행.
③선조, 도원수 권율, 도체찰사 이원익 등 원균에게 출전 명령. 원균, 육상병력의 지원없는 수군만의 단독출전은 고립으로 위험하다며 출전 거부(이순신도 같은 주장을 펴지만 기군망상으로 결국 파직).
④계속된 조정의 압력과 지원병 5000에 원균, 100여척을 이끌고 부산포 진격(6월18일) 중 안골포에서 왜군과 만나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등 철수. 이후 자신은 한산도 본영에 있으면서 경상우수사 배설을 보내 왜의 기지 웅천 급습을 지시하지만, 배설이 전선 수십척을 잃는 연이은 패전.
⑤권율, ‘조정을 기만했다’며 원균에게 태형과 함께 출전(7월11일 또는 14일) 명령. 권율, 원균이 능력도 없이 자신은 부산포를 공격, 왜군의 근거지를 쓸어버릴 수 있다며 이순신을 모함하고 호언장담한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
⑥원균, 부산포 급습의도로 160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지만 왜군에게 탐지된 상태에서 왜군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7월14일).
⑦귀환 중 가덕도에서 복병의 기습을 받자, 물을 길으러 갔던 아군 400명을 버리고 도주. 칠천량(거제도 하청면)에서 무방비 휴식 상태에서 왜군의 기습공격에 궤멸적 타격. 이 전투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전사하고 배설만이 살아남아 도주.
⑧이 단 한번의 패전으로 조선수군이 애써 쌓은 남해해상방어선이 무너지고, 왜군은 함선으로 순천 왜교 등으로 대규모 상륙작전 감행.
 
 
▲ 명군이 왜군을 맞아 일진일퇴를 거듭한 직산전투 전개도. 군비를 재정비해 북진하려던 왜군은 이어진 명량해전에서 패배하자,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고 남해안에 웅거한다.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02. 직산전투(1597년 9월7일 선조30, 충남 천안)
①칠천량의 승전으로 해상권을 장악, 병참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한 왜군은 남원을 함락(1597년 8월14일 선조30)하고 전주성을 무혈입성한 후 좌군 주력과 전주 주둔 우군주력이 연합해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를 유린하면서 북상.
②한성 도착 경리 양호(9월3일), 제독 마귀에게 왜군의 북상 저지 명령. 마귀, 부총병 해생과 2000기병 급파(9월5일)하고 곧이어 유격 파새의 2000기병 증파.
③부총병 해생의 명 2000기병, 천안 직산의 북부지역 도착(9월7일 새벽). 왜 우군 구로다 나가마사군의 선발부대(2000보병)도 삼거리에 도착해 명과 왜 대치.
④왜군, 조총사격에 이어 칼을 휘두르며 명군진영에 저돌적인 공격 시도. 명군, 포격과 백병전으로 응전하며 기병을 3대로 나눠 파상공격으로 왜군 격퇴.
⑤왜 구로다, 천안의 증원군과 함께 포위작전(총병력 5000) 펴지만, 명의 증원 파새의 2000기병 오후에 전장에 도착해 역 포위작전으로 왜군에게 타격(명 기병위주 4000 VS. 왜 보병위주 5000).
⑥천안 주둔 모리의 본진 증원군, 명의 측면을 공격하자 명은 퇴각하고 왜군은 추격하지 않아 전투 일단락.
⑦명이 압도적인 승전을 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우세한 전투로 왜군의 진격을 꺾었고 왜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지는 않아 재진격 준비 중 명량해전으로 병참보급이 끊어지자 철수.
⑧명은 직산전투, 제3차 평양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를 조선의 3대 전투라고 평가.
 
 
▲ 진도대교에서 내려다 본 남해안. 명량해전은 왜군의 서해안 진입을 막아 한양으로의 진격을 좌절시킨,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 경기도민뉴스

03. 명량해전(1597년 9월16일)
왜군은 칠천량 승전 이후 조선수군의 반격 등을 염려한 것인지, 단 한번의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한 것을 믿지 못했는지, 별다른 해상작전을 펼치지 않는다.
이것이 이순신이 복귀하자마자 전비를 확충하는 시간을 벌어줬다. 불행중 다행으로 칠천량패전이 순전히 최고지휘권자인 원균 1명의 무능력때문이어서 조선수군은 패전은 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어 훗날 재기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선조는 이순신을 내심 복귀시키려 않으려는 시도도 하지만 대신들이 강력하게 주장하자 이순신을 다시 복귀시키기는 한다.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7월18일 복권되자 마자, 부임지로 곧장 가지 않고 들르는 곳마다 군비태세를 점검하며 수군 복원을 시도한다.
 
①왜군은 명량해전에서 패배하자, 직산전투의 접전 이후 군비를 재정비해서 북진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남해안의 근거지에 왜성을 쌓고 웅거. 한양을 점령하고 삼남을 완전하게 장악하겠다는 정유재란의 기본 전략이 뒤틀리게 한 전투.
②칠천량에서 조선수군에게 치명타를 입힌 왜군은 명량에서의 패전 이후,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조선수군이 두려워 적극적인 해상작전 불가능 상태. 따라서 명량은 단순히 극적인 승전이 아니라, 이후 전쟁 전체의 향방을 뒤집은 조선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전투.
③이순신, 칠천량 패배 이후 떨어진 군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총력 경주. 칠천량에서 도주했던 배설이 10척의 전선을 이끌고 회령포로 귀환(8월18일)하면서 겨우 수군의 면모 갖춰. 회령포에서 이진포로, 다시 토사관락으로 앓던 중 어란진으로 이동.
④어란진에 머물던 중 왜의 정탐수색선 8척이 어란진으로 들어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둘러 물리치고 갈두까지 추격했다가 귀환(8월28일). 전력부족으로 방어에 유리한 벽파진 이동(8월29일)해 왜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 이때 배설이 탈영(9월2일).
⑤9월3일~13일 난중일기는 왜군이 이미 이순신의 함대가 13척에 불과한 것을 알고, 어란진과 벽파진을 기웃거리며 도발하고 탐색하는 동정을 기록. 왜군 200여척 중 55척이 어란진에 입항(9월14일 임준영의 보고)하고, 왜군에게서 탈출한 포로가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진공하는 작전 계획’ 알려오자 결전을 준비.
⑥대체적인 기록(실록, 정유일기, 왜군측 기록, 포로의 진술 등)을 종합검토하면, 왜군의 130척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기함)이 홀로 울돌목에서 2시간 가량 접전하며 왜군 적함대의 진격을 방어. 이순신의 대장선이 가장 선봉에서 적함대를 막아서고 방어할 때, 왜의 대함대와 울돌목의 거센 조류에 압도당한 부하 장수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만.
⑦이순신,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걸어 중군장과 여러 전선 소집. 거제현령 안위가 가장 먼저 도착해 전투 참여. 대장선의 호위와 지휘명령 전달 중군장 김응함이 뒤이어 도착하자 즉각 꾸짖으며 전투참여 독려. 그제서야 이순신 휘하 장수들, 전투에 참여하며 난전 벌어져 이순신이 몸소 포위당한 안위를 위해 적선 3척을 깨고 구원하는 등 활약.
⑧오전 일찍 역류속에서 이순신의 대장선 홀로 수행한 전투가 휘하장수들의 참전으로 점차 호각으로 바뀌고, 정오쯤 울돌목의 조류가 뒤바뀌자 왜군의 함대 격침하기 시작. 해협의 산위에서 통곡하며 전투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기적 같은 승리에 이순신을 신격화하기 시작.
⑨전투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 격파되고 구루지마 사망. 안골포에서 투항했던 항왜(준사)가 자신의 옛 상관 마다시(馬多時)의 시체를 알아보자 이순신, 마다시의 시체를 건져내 토막내어 배에 걸어 왜군의 사기를 꺾어.
⑩수군 총지휘 도도 다카토라 화살에 맞아 중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의 패배를 확인하라고 파견한 감독관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졌다가 구조.
 
<이순신 정유일기(9월16일)의 기록>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安衛, 欲死軍法乎? 汝欲死軍法乎? 逃生何所耶(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 罪安可逃欲爲行刑, 則賊勢又急姑令立功(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기사입력: 2017/12/06 [07:3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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