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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영조, 죽기살기의 당쟁을 탕평책으로 완화
초기=소론위주, 중기=노론위주, 후기=척신위주…한계 드러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04/16 [06:46]
[김쌤’s 한국사] = 세 차례의 환국으로 왕권의 우위를 확립했던 숙종(1661년~1720년, 재위 1674년~1720년)이 사망하자 즉위한 왕이 바로 장희빈 사이에서 낳은 경종이었다. 장희빈이 남인계열이므로 서인(송시열 등)은 장희빈을 극도로 경계했고, 숙종은 경신환국(1680년 숙종6)으로 (장희빈을 배척하는)서인을 축출한다.

서인이 재집권하는 계기가 되는 갑술환국(1694년 숙종20)은 장희빈 사사, 영조 출생(무수리 최씨를 총애한 결과) 등과 함께 전개됐다는 점에서 왕실-권력-사대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 영조어진(英祖御眞 보물 제932호, 1987년 12월26일 지정). 이 초상화는 영조 20년(1744)에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1900년에 당대 일류급 초상화가들이 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이다.(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의 대립은 왕의 옹립과 함께 자신의 파당이 정권을 독점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하다. 정권=관직=부=명예를 보장하는 전 근대적 조선사회에서 당쟁은 이제 더 이상 고매한 정치철학과 성리학의 학문적 성과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편이 아니면 적이므로 모두 죽여버리는 극한의 정권다툼으로 치닫는다.
 
01. 소론탕평(영조5, 1729년~영조17, 1741년)
①영조 자신이 노론, 소론의 다툼 속에서 갖은 옥사(역모사건)를 겪으면서 목숨의 위협까지 겪었던 터라, 즉위하자마자 탕평에 총력.
②이때 영조의 정치철학에 동조한 세력을 탕평파라고 통칭. 영조 즉위 초기에는 소론이 정국을 주도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을 소론탕평이라고.
③영조 즉위 초~영조17(1741년)까지 소론탕평(少論蕩平) 시기는 소론의 조문명ㆍ조현명 형제, 송인명 등이 탕평을 주도하고 일부 노론 인사들이 참여.
④소론탕평기는 기유처분(영조5, 1729년)으로 노ㆍ소론의 온건파 고르게 등용 원칙 적용. 정부 요직의 등용에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원칙 적용해 당파적 안배 중시.
⑤기유처분은 노론과 소론의 중요 정치현안이었던 신임옥사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내세워 종결한 정치적 합의. 탕평파의 집권 명분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논리이기도.
 
 
02. 노론탕평(영조17, 1741년~영조31, 1755년)
①영조, 경신처분(영조16, 1740년)과 신유대훈(영조17, 1741년)으로 노론의 명분 정당화.
②영조17(1741년)~영조31(1755년)의 시기, 탕평파 중에서도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소론이 참여해 노론탕평이라고 통칭.
③영조, 당쟁의 근본원인인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과 한림회천법(翰林回薦法) 혁파(영조17, 1741년). 조현명의 주선으로 소론 준론계 유수원이 ‘관제서승도설’에서 연공에 의한 승진제 적용 건의.
④통청권과 회천법의 혁파는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장관인 판서(판서는 국왕이 임명하므로, 결국 국왕이 인사권을 장악)에게 인사 임용권을 주는 것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강화해 직업적 관료를 양성하려는 방침.
⑤당쟁의 불씨를 제거하자, 쌍거호대에서 유재시용(惟才是用, 능력위재 등용)으로 인사방침 변경.
 
 
03. 척신탕평(1755년 이후~)
①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 영조31, 1755년) 이후 조재호, 정휘량, 홍봉한 등의 척신들이 탕평 주도.
②을해옥사는 소론의 불평 세력들이 주동이 돼 일으킨 모반사건(1755년 1월)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주모자인 윤지 포함 박찬신, 조동정, 조동하, 김윤 등 소론측 사형(1755년 2월).
③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에서 답안지변서사건(1755년 5월) 발생,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 사형. 이어 강원 춘천에서 윤혜, 김도성, 신치운 등의 역모사건 발각으로 소론은 궤멸.
④천의소감(闡義昭鑑)(4권 3책) 편찬 반포(1755년). 이로써 경종의 시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소론으로부터 의심받아 처신이 어려웠던 왔던 영조 자신의 입지 확립. 이후 소론은 더 이상 당색을 내세울 수 없게 되었고 노론의 정치적 주도권 확립.
 

<천의소감>

①영조의 명으로 찬술한 것으로 1755년 완성해 광주부(廣州府)에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로 인쇄, 간행.
②1721년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된 이후 1755년 나주벽서사건까지 수차례 역모사건 발생.
③영조는 그 원인이 세제 책봉을 둘러싼 분규때문이라 보고, 세제 책봉이 정당한 처사였음을 밝히기 위해 편찬.
④편찬 책임자는 영중추부사 김재로, 영의정 이천보 등으로 세제책봉부터 나주벽서사건까지 영조 즉위의 정당성과 정권의 정통성을 소상하게 밝혀.
 

기사입력: 2018/04/16 [06:46]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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