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094] 조선인구의 3할을 앗아간 3대 기근
전 세계 소빙하기…계갑ㆍ경신ㆍ을병으로 최대 500만명 사망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07/16 [08:47]

[김쌤’s 한국사] = 임진왜란 와중에 조선은 계갑대기근(1593년~1594년)으로 100만명의 사망자 중 70만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어 정묘ㆍ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에 또 한 번 경신대기근(1670년~1671년)이 들이닥쳐 전쟁이 벌어진 상황이 아닌데도 100만명이 사망(당시 조선인구는 1200만~1400만명)한다.

한숨 돌리려는 조선은 이어 을병대기근으로 또 다시 위기를 맞는다. 경신대기근의 참사 속에서도 오랑캐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뻗대던 조선은 을병대기근때는 어쩔 수 없이 청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경신대기근은 조선만의 사건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재앙이었던 것이 밝혀진다.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휩쓴 세 번의 대기근은 조선인구의 30%가량을 앗아간 대재앙이었다. 그 원인은 전 지구적으로 기온이 1℃ 낮아진 소빙하기 때문이었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케플러, 갈릴레이 등 과학자들 남긴 상세한 천문관측 기록과 꽃가루, 빙하퇴적물, 나무의 나이테 등을 통한 연구로 17세기 전 지구적 대재앙은 태양 흑점활동의 약화에 따른 태양에너지의 감소로 전 지구적으로 온도가 1도 내려가는 소빙하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농산물 생산량이 줄어들고 알프스의 빙하가 늘어났고, 한 여름에도 강과 운하가 얼어붙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자, 민심이 흉흉해져 마녀사냥이 들끓었다. 중국에서는 강남의 감귤농장이 추위로 타격을 받아 생산량이 전무한 상태가 됐다.

전 세계적으로 100년동안 겪은 소빙하기는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을 촉발시키고, 조선에서는 신분제의 붕괴를 불러오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근본적인 개혁보다는 성리학적 규범을 민초들에게 강요하는 반동 정치를 강행한다. 이 반동정치는 훗날 전국적인 민란으로 이어진다.
 
 
1. 계갑대기근(1593년~1594년, 선조)
임진왜란 사망자 100만명중 70만명이 기근으로 굶어 죽어
①임진왜란 발발(1592년)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과 갑오년(1594년)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 기록에 따르면 70만명이 굶주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 사망자 70만명은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사망한 조선백성 100만명 중 70%.
②당초 명의 조선 지원군은 은자(銀子)를 갖고 와서 군량을 조달하려 했으나, 조선의 상업운송이 발달하지 않은데다, 기근으로 군량 조달 자체에 어려움 겪으면서 일부 약탈을 자행하기도. 이 때문에 ‘왜군은 써레질을 하며 지나가고, 명의 군대는 참빗으로 훑고 지나간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오기도.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12일 정묘 기사>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미 수만 명의 대병을 조발하여 뒤를 잇는다고 합니다. 군대를 조발하는 책임은 명나라 조정에 있고 군량 조달의 책임은 우리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탕진된 재력을 가지고 수만 명의 명나라 군사를 지공하여야 하니, 오늘날의 걱정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오직 군량이 없는 것이 걱정입니다.

 
③조선이 군량보급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근에 허덕이자, 명은 자국 군대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몇 차례 군량을 지원. 의병장인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황제가 100만석을 내려 백성이 기근을 면하니 황은에 감복한다는 내용을 남길 정도.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 12월12일 무술 기사>
중국에서 그대 나라의 군량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8만석을 준비하였는데 쌀과 콩이 반씩으로 이미 강연보(江沿堡)에 쌓아 놓았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4월1일 을유 기사>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석을 내려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16일 병인 기사>
요동(遼東)에서 나온 것이 14만석이나 되고 이번에 산동(山東)에서 나온 것이 또 12만석인데, 이미 나온 양곡의 소재도 모릅니다. 그 나머지 10만석 또한 장차 계속해서 오게 될 것이니, 평양에 운반해 온다면 따로 1인을 시켜 관장하게 하고 오는 대로 받아 쌓아놓고 실제 수량을 파악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④기근에 못이긴 조선은 허욱을 청량사(請糧使, 곡식을 지원해달라는 사신)로 삼아 명에 곡식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1594년 1월). 명은 조선 백성을 위해 2만석을 내놓지만, 조선이  직접 운송할 것을 조건으로 달아. 당시는 명도 기근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양곡을 지원해주기가 쉽지 않은 상황.

⑤조선 지배층, 기근 타개를 위해 명과 압록강 하구에서 ‘중강개시’ 교역 시작(1594년초, 음력으로는 1593년말). 당시는 청의 누루하치가 아직 자신의 세력을 온전히 펴지 못하던 시기로 이 당시 요동의 지배자는 이여송 가문. 조선은 1595년과 1596년에는 풍년이 들어 일단 대기근을 겨우 면하는 정도로는 회복.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3일 임자 기사>
요동 지방에 연이어 풍년이 들었으니 중강개시하여 물화(物貨)를 유통하는 것은 온당할 것 같습니다. 자문(咨文)을 보내어 도사(都司)에게 요청하게 하소서.


⑥임진왜란 종전 후 조선에 또다시 흉년이 들자, 명은 조선에서 군을 철수할 때, 의주에 쌓아놓은 군량을 모두 조선에 선사. 당시 조선은 명군 1000명에게 줄 곡식이 없을 정도. 이후 조선이 명의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도와 준 은혜)에 감복한 것은 단순히 참전한 것뿐만이 아니라, 굶어죽을 위기를 면하도록 해준 것 때문.
 
 
2. 경신대기근(1670~1671, 현종11~12)
신분제 붕괴, 유민의 간도 유입, 지배층은 반동적 억압 일관
①최근 과학적 고찰에 따르면 17세기는 전 세계가 소빙하기로 기근을 겪는 상황이었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고 작은 자연재해는 있었지만, 1670년(경술) 한해동안 전국적으로 온갖 자연재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면서 식량생산 사실상 파탄.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굶고 병들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하면서 조정도 이듬해(1671년 신해) 적극적으로 구휼에 돌입.
 
<현종개수실록 25권, 현종 12년 12월5일 임오 기사>
기근ㆍ여역(장티프스)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수가 거의 100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비록 임진ㆍ계사년 전란의 참혹함이라도 거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②황해도에서만 2만마리 이상의 소가 우역(전염병)으로 폐사하고, 전국 360개 고을이 가뭄ㆍ홍수 등 피해를 입으면서 대규모 유랑민 사태 발생. 유랑민은 그나마 진휼이 잘 이뤄지는 서울로 몰리면서, 국가 기능의 서울 집중화 현상 심화.

③대규모 유랑민으로 지방행정 붕괴상태에서 조정은 부족한 재원 확보를 위해 납속책과 공명첩 남발하면서 신분제 붕괴 가속화. 대기근으로 체제불만 높아지며(도적 장길산), 일부 백성들 비기ㆍ도참ㆍ미륵신앙 등 신봉. 조선 조정은 호패법 강화와 오가작통제 등으로 통제 강화. 먹고사는 생존사회에서 지배층은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해법으로 예학을 강조.

④부족한 재원 확보 위해 납속책, 공명첩 시행으로 신분제 붕괴. 조선의 유민들이 미개척지였던 북방(만주)으로 이주하면서 청과 국경분쟁 발생. 훗날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간도 귀속 문제의 한 원인을 제공.

⑤조선은 환곡(일종의 전 근대적 금융구조)과 진휼미 운송으로 재난에 대비했지만, 전국적인 기근을 대처하기에는 역부족. 가급적 마을 자체에서 기근을 해결하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따라, 각 지방 관청 위주의 진휼고 등 대거 마련. 그랬던 진휼 시스템인 환곡은 19세기 탐관오리의 수익모델로 변해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
지방의 자급자족 강조는 군포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에 따른 중앙 재정 고갈에 따른 것.

⑥경신대기근 이후 그나마 백성들이 살아남은 건 대동법으로 부담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란 인식이 지방 산림들에게까지 퍼지면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

⑦한양도성에도 수만은 사람이 죽어나가자, 관리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피. 사망자가 너무 많아 정식 장례를 치르기도 어렵게 되자, 승려들을 동원해 합동 매장. 영조 때 도성을 정비하다, 매장된 인골 수천이 쏟아져 나와서 영조가 경악하기도.

⑧신해년(1671년) 여름 굶어죽는 백성이 늘어나자, 형조판서 서필원이 현종에게 청나라의 쌀을 수입할 것을 건의하지만 조정은 운송과 후환이 두려워 반대. 연말 조정의 비축미가 바닥나자 현종이 청나라 쌀 수입 건을 다시 제의하지만, 신하들은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또 반대.

⑨당시 조선은 청에 1년 세폐(歲幣. 중국으로 해마다 보내는 물품)로 쌀 1만석을 보냈고, 일본에도 1만6000석을 교역 답례로 보낼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지만 경신대기근으로 참혹한 피해.
 

3. 을병대기근(1695년~1699년, 숙종21~25)
정묘병자의 치욕을 무릅쓰고 청에 곡식지원을 요청하다
을병대기근은 1695년(을해, 숙종21)과 1699년(병자, 숙종22)의 대기근을 지칭하지만 통상적으로는 1699년까지 이어진 숙종 당시의 대기근을 포함해 지칭하기도 한다. 숙종8~9년, 숙종11~13년, 숙종21~25년(을병대기근), 숙종30~34년, 숙종43~44년 등 숙종의 치세에는 온갖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①지구 전체가 소빙기로 접어든 시점에서 특히 을병대기근(1695년~1699년, 숙종21~25)의 피해는 혹독해서 실록의 국가 공식 사망자가 서울 3900명, 각도 총합 25만700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참상.

②계유년(1693년, 숙종19)의 장적은 129만3083호(577만2300명)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병자년(1696년, 숙종22)의 장적은 103만9692호(435만6026명)로 25만3391호(141만6274명)이 감소.

③학계(김성우 논문)에서는 현종때의 경신대기근으로 140만명, 숙종때의 을병대기근으로 400만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당시 인구는 1200만~1600만으로 추정. 따라서 조선 전체인구의 30% 정도가 세 번의 대기근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

④견디다 못한 숙종(지배층)은 결국 청에게 지원을 요청(1696년, 숙종22). 청의 예부(외교부)는 조선의 요청을 거부하려 했으나 강희제가 직권으로 조선의 지원 요청을 승인.

⑤강희제의 명령으로 청은 6만석을 중강으로 운반해 조선에 지원. 명이 임진왜란 동안 대략 65만석을 무상으로 지원한것과 달리 2만석만 무상 지원하고, 4만석은 유상(1곡斛마다 은 5냥7전으로 계산. 1곡은 10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5두로도 통용)으로 지원.

⑤콧대만 높은 조선이 제발로 청에 지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진 강희제는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라는 글까지 지어 그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자축.
 
 
※ 참고사항 경신대기근 전후의 조선 쌀 생산량

1592년 임진왜란전 조선500만석(70만톤), 일본 1850만석(280만톤)
1700년 조선 650만석, 일본 2500만석
조선시대 경작지
고려 공양왕(1390년)=70만결(벼농사 가능 논 면적 17만결)
조선 태조(1410년)=120만결(벼농사 가능 논 면적 30만결)
조선 세종(1440년)=170만결(벼농사 가능 논 면적 40만결)
조선시대 벼농사 생산율
조선중기=1결에 20석, 조선후기=1결에 40석
※조선의 1석은 89리터, 일본의 1석은 180리터.

기사입력: 2018/07/16 [08:47]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