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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사도세자, 생모-생부-장인이 합심해 죽이다
다양한 해석있지만, 핵심은 당쟁이 불러 온 비극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08/01 [07:11]
[김쌤’s 한국사] = 조선왕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은 더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성리학적 명분을 고집하는 조선에서 생모가 자식을 죽이라고 청하고, 생부가 이를 받아들여 죽이라고 명령하고, 장인이 앞장서서 집행한 사건이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인 임오화변(1762년, 영조38 윤5월13일~21일)이다.

학계는 임오화변의 원인을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결, 세자를 둘러싼 궁중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광해군의 즉위와 몰락에서 보듯, 조선 후기 들어서는 당쟁이 더욱 격화돼 차기집권자를 옹립하는 측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영조 역시 당쟁 속에서 숱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에 올랐고, 왕위에 있으면서도 거의 한 평생을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설과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모함을 당해야 했다.
 
▲ 봉수당진찬도(보물 제1430-2호, 2015년 9월2일 지정). 8폭으로 구성된 ‘화성행행도병’ 중 한 폭. ‘화성능행도병’은 정조가 1795년(정조19) 윤 2월9일~16일 화성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행행(行幸)했을 때의 주요 행사를 그린 8폭병풍(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1) 뒤늦게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실망으로
①영조가 자신의 아들이자 국본인 세자를 죽인 때는 재위 38년(1762년)째로, 이때는 영조가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경종 독살 등)에서 상당히 벗어난 시기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있던 시기.
②당초 영조는 사도세자의 총명을 극찬하며 신뢰를 보이지만, 사도세자가 10살때쯤부터 본격적인 세자수업을 시작하자, 세자를 혹독하게 질책하는 등 태도가 변하기 시작. 깡마른 체구의 영조와 달리, 사도세자는 건장한 체구로 영조는 세자의 식탐을 못마땅해.
③한중록은 아버지 영조(민첩)와 아들 사도세자(과묵)의 극명한 성격차이를 지적. 사도세자는 앞서 효종과 비슷한 정도로 체구가 크고 용력이 뛰어나 이미 15~16살 때 웬만한 무사들도 휘두르지 못하는 청룡도를 손쉽게 놀릴 정도로 무용이 뛰어났다고.
④영조는 사도세자가 4~5살때부터 식탐이 강하고 비만기가 있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이 실록 등에 나타나기 시작. 한중록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태어나자마자 생모 영빈이씨에게서 거둬 정성왕후 서씨의 슬하로 입양시킨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지적.
⑤그러면서 한중록은 사도세자를 모셔야할 최상궁과 한상궁이 세자의 생모 영빈이씨를 폄훼하고, 심지어 모자가 서로 만나는 것도 교묘히 방해하는 등 정서적 학대가 있었다고 주장. 여기에 영조의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 자신의 슬하자식사이에게도 그대로 드러나면서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서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고.
⑥어린 사도세자를 돌본 이들은 경종을 모시던 나인(소론계통)들이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정권을 장악한 노론측에서 사도세자를 음해했다는 주장도.
 

2) 과도한 기대가 질책으로 이어져
①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부자간의 비극이 심화. 매사 꼼꼼하고 민첩한 성격의 영조와 과묵한 사도세자는 영조왕권의 바탕이라 할 ‘신임의리’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던 듯. 사도세자는 신임의리는 인정하되 이에따른 특권은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으로 영조와 노론의 심기를 거슬려.
②세종-문종의 대리청정(아주 모범적인 관계였고, 결국은 건장했던 문종이 과로로 요절할 정도가 비극이라면 비극)과 달리, 영조-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순전히 영조 자신의 고집에 따른 것.
③영조 25년, 사도세자가 15살 때 영조는 왕권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위파동을 일으켜. 신하들의 반대가 이어지자, 타협책으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을 제안하고, 이것도 반대하자 영조는 ‘그럼 나는 선위하고 말 거야~’라고 주장해 결국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억지로 맡겨.
④영조 자신이 노론의 대리청정으로 인해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겪었으면서도, 자식에게 유사한 부담을 지운 것에 대해 소론을 편드는 사도세자를 견제하기 위해 영조와 노론(김상로, 홍봉한)측이 꾸민 정치적 트릭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
⑤영조의 대리청정이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는 것은 사도세자가 대리한지 달포쯤(1749년 2월16일, 영조25년) 세자가 물어보면 결정을 못한다고 질책하고, 물어보지 않으면 멋대로 경정했다고 질책하면서 사도세자는 영조를 더욱 두려워 해.
⑥영조의 선위 파동은 1752년 12월8일~19일에도 이어져, 당시 홍역을 앓고 났던 사도세자는 눈밭에서 열흘간 석고대죄하고,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는 등 고역을 겪어.
⑦영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문’에 치우친 영조와 달리 ‘무’를 숭상하는 사도세자에게 끝없이 공부를 강조하면서, 요즘 식으로는 지나친 정서학대를 감행한 것.
⑧왕에 즉위하기 전부터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던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 1755년, 4권3책, 자신의 왕권 정통성을 밝힌 책) 편찬 반포 이후에도 수차례 역모사건(홍상범1777, 문인방1783, 문양해1785, 교영계1787)이 발생할 정도로 반대세력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려.
⑨이런 상황에서 문보다는 무에 치우치고, 자신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도세자에 대한 실망이 결국은 제거(여기에는 노론집권층과 당대 신료들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는 설도)로 결정한 듯.
⑩사도세자는 민간에서 돈을 빌려쓰고 갚지 않았으며, 서북지역으로 유람을 떠나며 기생을 기고 술을 마시는 등의 성리학적 명분에서 벗어난 행동 일삼아. 궁궐에서도 칼을 휘둘러 나인 등 100여명을 참살하기도.
 

3) 대리청정 왕세자의 죽음을 말렸던 신하가 없었다
①대체적으로 영조는 정조의 탄생이후부터 자신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를 접은 듯. 정조가 가례(혼인, 1762년 영조38)를 올리고, 자신의 뜻을 잘 받드는 등 총명을 보이자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사도세자 제거 결심한 듯.
②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1761년 우의정(3월), 좌의정(8월), 영의정(9월)으로 빠르게 입지를 굳혀 가자 노론계열 김한구, 김상로, 홍계희, 윤급 등이 위기감을 느끼고 풍산홍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세자 폐위 획책.
③그러던 중 윤급의 종인 나경언을 시켜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안도에 몰래 나갔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라는 등 세자의 비행을 담은 10개항목 고발(1762년 5월22일).
④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문책하고, 고변자 나경언을 충직한 자로 보아 살려주려 했지만, 홍낙순과 남태제 등이 나경언이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이라고 주장해 결국 참수형.
⑤나경언의 고변에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지만, 영조가 거부. 이후 세자의 각종 비행이 잇따라 터져나오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요구. 사도세자가 자결하지 않고 버티자 영조가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8일만에 굶겨 죽여(임오화변).
⑥사도세자는 1735년(영조11) 1월21일, 영조와 후궁 영빈이씨 사이에서 출생. 당시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42세에 얻은 늦둥이 사도세자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지만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
⑦정조는 현륭원(顯隆園) 지문(誌文)에서 문녀(숙의문씨)와 오빠 문성국 등 궁중세력과 김상로ㆍ홍계희 등 일부 노론세력이 연합해, 세자에 대한 모함을 주도하고, 일부 소론 탕평당도 갈등을 조성하는 등 세자의 지위를 흔들었다고 평가.
⑧이런 상황에서 조모 인원왕후와 법모(法母) 정성왕후가 연이어 사망(1757년 영조33)하며, 왕실내에서 사도세자의 보호막 사라져. 사도세자는 우물에 뛰어드는 등 자살소동 벌이기도.
뒤이어 이천보ㆍ민백상ㆍ이후 등 사도세자를 보호해주던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1761년, 영조37)하고, 이듬해 임오화변 발생.
⑨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도 온갖 의혹과 물의가 횡행. 그토록 군신간의 절의를 강조하며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세자가 죽어 가는데도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한 신하가 없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가장 큰 비극. 이후 임오화변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새롭게 당파가 형성되기도. 정조는 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신임의리(1721년 신축~1722년 임인)
 
1721년 신축~1722년 임인 연간에 경종 대신 영조(당시 연잉군)를 지지하다가 죽음을 당한 노론측의 의리. 노론은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위 계승자인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영의정 김창집 등 수백여명이 죽고 유배를 당한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고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영조를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는 점(신임의리)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한다.
 
기사입력: 2018/08/01 [07:11]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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