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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조선-명의 관점에서 벗어난 임진왜란
일본, 도요토미 영웅적 면모 부각하며 경제적 관점도 중시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08/14 [08:02]
[김쌤’s 한국사] = 임진왜란을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르고, 일본은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 문록경장의 역)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명은 앞서 정화의 대항해(1405년~1433년) 이후, 해금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영파(寧波 절강성 동쪽 용강강甬江江 하류의 도시)라는 곳만 개방한다.
 
 
◇ 일본, 중국중심의 무역질서에 해양세력이 도전한 것으로 해석
①임진왜란 발발 당시 명(明)은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특히, 영파에는 유럽의 상인들이 차, 비단, 도자기를 구매하기 위해 들락거렸다. 고령토와 누에나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유럽은 도자기와 비단을 값 비싸게 살 수밖에 없었고, 지불수단으로 은(銀)을 사용했다. 이때 차의 수출항이었던 광동지방의 방언 ‘떼’가 차(tea)의 기원이 된다.
 
▲ 임진왜란 발발 당시 중국은 세계무역의 중심지였고, 교역의 지불수단은 은(銀)이었다.     © 경기도민뉴스

②1567년~1644년 중국의 은 유입량은 1125만kg으로 현재의 시세로 따지면 5조원(20018년 8월 기준 금 한돈 17만원, 은 한돈 1700원)이 넘는 금액이다. 당시 유럽의 금과 은 교환비율은 1대12였지만, 은이 넘쳐나던 명에서의 금과 은 교환비율은 1대6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③또 이 당시 전세계 은 유통의 30%가량은 일본에서 생산(은을 쉽게 제련하는 연은분리법은 조선에서 개발했지만, 이를 활용해 대량생산한 것은 일본)한 것이었다.
④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제무역도시 중국의 영파를 주목했다. 허세병도 있었던 도요토미는 조선과 함께 명을 치고, 영파에다가 자신의 막부를 건립하려 했다고 일본학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
⑤이같은 분석은 청일전쟁 직후 승전 분위기에서 일본의 일부학자들이 신공황후의 임나정벌과 연결, 조선병합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또 도요토미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명(明) 중심의 국제무역질서를 일본 중심의 무역질서로 변환하려한 것이라는 논리로 발전한다. 당연히 중국침략을 위한 논리로도 발전한다.
 

◇ 태국, 류쿠, 만주 등 주변세력이 임진왜란 참전 희망
①임진왜란은 표면적으로는 명-조선연합군이 왜군과 치른 전투지만, 당시 만주의 실력자로 떠오른 누르하치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려는 의사를 표명하고, 명의 정붕기는 섬라(타이)의 병력을 빌려 왜의 본토를 치자(차병섬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구상도 내놓는다. 아직 사츠마번의 속국으로 정복당하기 전의 류쿠국은 명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에 귀속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②명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당시 샴국의 아유타왕조와 류쿠 등의 해상세력이 연합해서 왜를 공격하라는 희망을 비치기도 한다. 특히 류쿠는 명-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정붕기의 ‘차병섬라(借兵暹羅)’ 계책은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을 맞아 헌책을 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③당시 석숭의 인재공모에 최종적으로 통과한 사람은 정붕기와 심유경이었다. 정붕기는 흠차대신(조선식으로 따지면 암행어사 비슷한 황제의 특사)의 자격을 칭하며 ‘차병섬라’ 계책을 실행하기 위해 샴국으로 간다며 산동, 절강 등을 떠들썩하게 거치며 지방관리에게 막대한 뇌물을 뜯은 후, 증발해버린다.
④정붕기가 사라지자, 명의 지배층은 남은 심유경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고, 어쩔 수 없이 조선에 강화사로 온 심유경은 고니시와 함께 글을 모르는 도요토미를 상대로 온갖 사기와 모략으로 협상을 진행하다가 결국은 처형당한다.
⑤최근(2018년 6월) 안대회 교수(성균관대 한문학과)는 ‘임진왜란 소사전투의 명 원군 원숭이 기병대’논문에서 실제 원숭이 특수부대가 참가했다는 주장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이에 대해 앞서 ‘차병섬라’ 등의 이유를 들어 아유타왕국의 병사들이 참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섬라는 당시 명의 황제에게 왜의 배후를 치겠다는 상소를 하기도 하지만, 오랑캐에게 도움을 받으면 후환이 있다는 신하들의 반대도 있고 해서 결국은 이뤄지지 않았다.
 

◇ 7년전쟁 종료…류쿠가 일본에 병합 당해
①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당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으나(1587년 음4월17일~5월 22일) 항복했고, 항복 이전 기사키하라의 전투(1572년)에서 숙적 이토 요시스케의 3000군을 300병사로 요격(훗날 ‘규슈의 오케하자마 전투’로 명명)하며 무명을 쌓는다.
 
▲ 중국의 차, 도자기, 비단을 구입하기 위해 유럽은 막대한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했고, 훗날 아편전쟁으로 이어진다.     © 경기도민뉴스

②개인적인 무용과 전략적 판단도 뛰어났던 듯, 임진왜란 당시 조-명의 사로병진에 맞서 1598년 봄 사천전투에서 7000병력으로 조-명 연합군 4만군을 격파했다. 앞서 칠천량해전에서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수군에 배속, 원균을 격파했다.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는 50여척만 패주하는 악전고투 속에 고니시를 구출, 무사히 귀국시켰다. 이 전투에서 조선은 이순신을 잃었다.
③임진왜란 직후 동군(도쿠가와 이데야스)과 서군(도요토미)으로 나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음9월15일)에서는 도쿠가와에게 반기를 든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의 1500병사 중 300여명만이 전장을 탈출하지만, 집요한 동군의 공격으로 본거지인 사츠마로 최종 탈출한 인원은 8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는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주축으로 사쓰마 토벌군을 보내려 하지만, 정권 초기의 부담때문에ㅐ 일주일만에 정벌을 중단하고 화해(1602년)한다. 대가는 시마즈의 아들 다다쓰네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이었다.
④도쿠가와의 추격을 피하는 방법이 특이한데, 뭐 엄청난 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스테가마리(捨て奸)’라고 해서 소수의 결사대가 저격과 적진 난입으로 본진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또다시 추격에 붙잡힐 것 같으면 같은 방법을 무한 반복하는 방법이다. 당연히 결사대는 전사할수 밖에없어, 부하로부터의 신망이 두텁지 않으면 채택할 수 없는 전략이다. 시즈마는 가신을 소중히 여겨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고 병졸과 함께 불을 쬐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주둔 왜군의 상당수가 얼어죽었지만, 시마즈군에서는 단 한명의 동사자가 나오지 않았다. 부하에게는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겠지?”라거나 “자네 부친은 운이 없어 공훈을 세우지 못했지만, 자네는 부친보다 우수하니 공훈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일일이 격려했다.
⑤시마즈의 사츠마는 전국시대 당시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도요토미의 침략으로 실패했고, 임진왜란 참전에서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최고 권력자인 도쿠가와의 눈밖에 난 시마즈는 살아남기 위해 당시까지만 해도 독립국이었던 류쿠를 노린다. 또 시즈마의 사츠마는 무사의 비율이 유난히 높아(무사의 비율이 전국 평균의 5배) 생산성 저하로 먹여살리기 힘들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⑥시마즈는 아들 타다츠네에게 자리를 물려줬고, 타다츠네는 류쿠에 사신을 보내 에도막부에 조빙(통교)할 것을 요구(1608년)한다. 류큐의 삼사관(三司官 재상급)의 한명이, 타다츠네의 사신을 모욕하자, 기회를 노리던 타다츠네는 즉각 류큐침공을 결행한다.
⑦사츠마에서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와 3000 병사가 출발(1609년 3월4일), 7일에 아마미 제도의 아마미오오시마 함락(1609년 3월7일),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 함락(3월27일)에 이어 수리성까지 진군했다. 사츠마의 조총 공격에 결국 류쿠국은 항복하고(4월1일), 류큐의 왕자와 삼사관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체결했다.
사츠마군은 류쿠의 쇼네이왕과 100여명의 신하를 사츠마로 끌고와 충성의 맹세를 시킨 후, 에도까지 끌고 가 다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했다.
⑧류큐가 중국의 조공국가로 남아있는 편이 이익이 더 컸기 때문에 사츠마는 류쿠를 반독립세력으로 존속시키며 속국 비슷하게 삼았다.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이라는 관리를 두어 류큐를 감시한 것은 몽골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이나 이문소와도 비슷했다. 지리적 이점으로 중국 남해안 해상무역 중심지였던 류큐는 중국, 사츠마, 에도막부에게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했다.

기사입력: 2018/08/14 [08:02]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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