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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조선 중흥의 움직임 영ㆍ정조
현실 반성…산업발달ㆍ유통경제 본격 성장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08/16 [08:30]

[김쌤’s 한국사] = 임진왜란에 이은 정묘ㆍ병자호란은 조선을 극심한 혼란에 빠트렸다. 숙종은 잦은 환국으로 당파의 분쟁을 이용, 왕권을 강화하면서 사회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기는 했다.

영ㆍ정조 시기는 이 시기 수습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의 새 기운이 사회 전반에 일어났다. 이 새 기운은 정치ㆍ군사ㆍ경제 분야에서 개혁을 불러왔다.
 
▲ 홍국영이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 강릉시 노암동 김윤기 가옥(문화재자료 제58호 1985년 1월17일 지정).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사회 안정을 바탕으로 18세기는 산업의 발달과 이에따른 유통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숙종조의 잦은 환국은 당쟁의 악영향을 극대화해, 일당독재로 흐르는 계기가 된다.
 
 
1)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
균역법(양인 군포부담 1필 반감) 토지에 결작(1결당 2두)부과

영조는 생모의 신분이 미천해 누구도 왕위를 이으리라는 예측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노론의 지원으로 왕에 올랐지만 이복형 경종의 독살설 관련 혐의를 받아야 했다. 왕세제인데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모에 연루, 절체절명 목숨의 위협도 겪어야 했다.
왕에 올라서도 끊임없는 유언비어에 시달렸고, 왕권을 부정하는 ‘이인좌의 난(1728)’을 겪기도 했고, ‘사도세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비극(1762)을 겪기도 했다.
 
①탕평책으로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 금지 → 영조의 명을 어긴 170개소 서원 훼철(1741).
②과거시험에 탕평과 시행(1772).
③균역법으로 양인의 군포부담을 연간 2필에서 1필로 반감. 연간 30만냥 상당의 재정결손은 전국의 모든 토지에 결작(1결당 2두 또는 5전)으로 충당. 토지가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던 당시 결작은 토지주인 양반층의 면세특권을 부정하고 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④일부 피역자에게는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명칭을 부여하고 군관포를 징수, 어염세ㆍ은결세 등 부과.
⑤영조는 균역법을 위해 친히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한성부민을 만나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 수렴(1750).
⑥가혹한 형벌 금지=압슬형 폐지(1725),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 엄격 시행(1729), 사문(私門)의 사사로운 형벌 엄금(1774), 신문고 부활.
⑦전국적으로 제언(저수지ㆍ보)을 수축(1725). 궁전과 둔전도 초과분량에 대해서는 과세(1729). 오가작통법 강화.
⑧청계천 정비(1760)
⑨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 전래(1763) → 획기적 구황작물.
⑩공사천법(公私賤法) 마련 시행으로 양역의 기반 확대. 양처(良妻) 소생은 모두 양인(1730),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라 양인으로 환원(1731). 서자의 관리등용 허용 서얼통청법(1772) 제정.
 

2) 정조(1752~1800, 재위 1777년~1800)
부친 사도세자의 비극을 알고 있는 정조는 왕권강화에 고심하며, 자신의 측근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정약용 등의 신진학자를 규장각으로 모아 힘을 실어준다.
당파의 뿌리가 깊은 권문보다는 서얼 출신을 검서관으로 중용하고, 실학의 학풍도 받아들였다. 수원 화성으로의 천도도 계획했던 듯 하다. 이 모든 조치는 왕권을 강화해 개혁을 이루려는 의도였다.
 
①벽파 홍인한ㆍ정후겸 등 제거, 홍국영 발탁 친정체제 구축.
②규장각 설치 → 제2의 집현전 구상. 검서관제도 만들어 서얼 출신 ‘검서관’ 등용.
③초계문신 제도=신진 관료 중 유망주를 선발,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도록 한 일종의 신진 정치 엘리트 양성 코스. 이가환ㆍ정약용이 대표적 인물. → 당파에 소속되지 않은 친위세력 양성 목적.
④사도세자 복권 후 수원으로 이장하며 어가(御駕) 행차 길에 억울한 백성이 징을 울려 직접 왕에게 사정을 호소하도록 한 격쟁(擊錚) 시행.
⑤노비추쇄법 폐지.
⑥실학의 현실개혁 이론 반영.
⑦통공정책(通共政策) 허용(정미통공1787년, 신해통공1791년 정조15, 갑인통공1794년)으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반영. 육의전의 특권 폐지로 상업발전 계기.

홍국영(1748~1781/정조5)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룩.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적극 보호하며 신임 얻고, 즉위하자 도승지로 정책 결정 총괄하고, 군사권도 장악. 누이를 정조의 원빈으로 삼았(1778/정조2)으나, 1년만에 사망.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 사망에 효의왕후를 의심,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아 정조의 은퇴 권유(1779.9)에 이어 왕후 독살기도(1780) 연루 혐의. 강릉으로 추방, 이듬해 사망.
 
균역법
양역의 폐단에 대한 대책논의는 효종때부터 시작, 심지어 숙종때는 병력수를 줄이는 방안까지 나올 정도였다. 수많은 논의 끝에 병력 수는 줄이지 않으면서, 면세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양반층을 만족시키는 절충안 중의 하나가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부족한 재정은 ‘결작’이라는 이름으로 양반층에게 부담시켜.
 
정순대비 김씨
영조의 마지막 왕비인 정순대비 김씨는 영조가 죽은 뒤에도 궁중의 어른으로 군림했다. 정순대비 김씨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궁중의 어른 노릇을 했다.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년이나 어렸다.
 
‘쌀 1두’와 ‘포 1필’의 가치

①방군수포제에서 수군에 입번하지 않는 경우, 한 달에 베 3필 또는 쌀 9두를 납부하고 군역 면제.
②쌀 1두는 보통 장정 1명이 한달간 먹는 식량. 쌀 1석은 장정이 1년간 먹는 량, 또는 장정 1명이 짊어질 수 있는 량으로 도정하지 않은 벼로 따지면 200kg이며, 도정한 쌀로 따지면 144kg으로 어림.
③훈련도감 소속 군인의 월 급료는 쌀 6두.
④조선 후기 영정법에서 토지 1결의 전세는 4두
⑤토지 1결은 넓이 개념이 아닌 생산량 개념으로 조선초 1결의 생산량은 400두~1200두이며, 후기에는 모내기 등으로 생산량이 2배가량 증가.
⑥정포 1필의 규격은 길이 16m38cm, 폭 32.8cm. 쌀 1두의 가치는 대체적으로 상평통보 40문(40개)이므로 단순비교로도 정포 1필은 100만원 상당의 부담이다.
⑦심청전의 공양미 300석은 일가족(4인 기준)의 평생 의식주 해결(현재 가치 18억원, 2016년)할 수 있는 가치. 당시 쌀 1석은 현재 600만원의 가치. 당시 쌀 1두의 가치를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30만원~60만원 선.
 
기사입력: 2018/08/16 [08:30]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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