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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제1차 중동전쟁(1948년 5월16일~1949년 2월24일)
이스라엘의 독립선언, 아랍권 반발하며 전쟁 일어나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09/08 [16:59]
[김영수 잡학여행] =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Middle East)은 지금도 분쟁이 진행 중이다. 이 분쟁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중동에서는 지금까지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지전 양상을 띠긴 했지만 이처럼 수많은 갈등이 일어난 지역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중동전쟁의 진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그 이유는 미국ㆍ유럽 중심의 세계관에 익숙한 탓도 있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안보논리’에 의한 의도적 세뇌 탓도 있으리라.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체제유지를 위해 남-북 대치 상황을 이용한 안보논리를 내세우며 아랍권과 싸우는 이스라엘을 모범으로 삼았었다.

이번 잡학여행 편에서는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4차례에 걸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전쟁에 관해 정리한다. 중동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서유럽적 관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통칭하기로 한다.


◇ 아랍권, 이스라엘 독립선언에 즉각 침공
1차 중동전쟁(1948년 5월16일~1949년2월24일)을 아랍측에서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이스라엘측에서는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양측이 부르는 전쟁의 명칭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이 전쟁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14일 독립을 선포했다. 당시 독립을 선포했던 이는 이스라엘 초대 총리인 벤구리온이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이집트 전투기들은 즉각 텔아비브를 폭격했다. 이스라엘과 아랍권과의 기나긴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이 전쟁에 아랍연합군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5개국이 참여했다.


▲ 이스라엘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모세 다얀 장군(Moshe Dayan, 1915년~1981년 10월16일. 왼쪽눈 실명은 1941년 6월 적정을 살피던 중 총탄이 망원경을 파손시키며 당했다). 이스라엘군 현대화를 이끌었으며 아랍권과의 전쟁승리로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 경기도민뉴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65만명이었고, 아랍연합국의 인구는 1억4000만명이었다. 이때 이스라엘에 직접적으로 참전한 아랍연합군의 규모는 2만여명이다. 유럽ㆍ미국은 물론, 아랍권에서도 이 전쟁은 누가 이기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끝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랍연합군은 대부분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정규군인데 비해, 성급한 독립선언만 했을 뿐,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군사교육도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 전쟁을 수행했다.

이스라엘은 부족한 무기를 갖고도 처절한 항쟁을 계속해 20여일을 버텨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냈다. 전 세계는 놀랐고, 아랍권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막강한 화력과 압도적인 군세를 갖고도 아랍연합군은 두 사람이 총 한 자루를 돌려쓰며 버티는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 이스라엘 군 현대화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
6월11일 스웨덴의 중재로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상을 진행하며 잠시 휴전하자, 미국과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거 무기와 군수품을 이스라엘로 보냈다. 짧은 시간에 현대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은 모세 다얀 장군(1915~1981 이스라엘의 정치가 군인 국방장관을 역임한 국민적 영웅)의 지휘 아래 평화협상이 타결되기 전 카이로(이집트 수도), 다마스쿠스(시리아 수도), 암만(요르단 수도)을 선제 폭격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아랍영토를 정복해나가자 아랍권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했다.

7월18일 영국의 주재로 열린 두 번째 평화협상 중에도 이스라엘군은 계속 아랍권으로 진격했다. 영국은 이런 이스라엘의 도발행위에 엄중 경고했고, 영국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던 이스라엘군은 점령지에서 일단 퇴각했다.

1949년 2월 이집트에서 평화조약을 조인하면서 이스라엘은 세계 각국의 인준을 받았지만 그것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초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랍권의 국가가 세워지기로 돼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웠다. 이에 반발한 아랍권과 이스라엘이 벌인 1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90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여하튼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때의 2배에 이르는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통해 군사강국으로 전 세계에 깊은 인식을 심어주면서 탄탄한 주권국가(자주국방의 능력이 미약하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것은 일제 침략시기의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 아랍권, 이해관계 따른 내분으로 자멸
제1차 중동전쟁은 이집트(파루크 국왕), 요르단(압둘라 국왕), 이라크(파이살 국왕), 사우디아라비아(사우드 국왕) 등 인접 왕국의 군대와 시리아, 레바논 등이 아랍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전쟁 초기만 해도 아랍연합군의 질적ㆍ양적 우세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초반의 유리했던 전쟁에서 아랍권이 패배한 원인은 아랍진영의 상반된 이해관계에 따른 내분 때문이다.

중동지역의 지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 미국 등 강대국의 자국중심주의에 따른 이중약속 등이 발단이 됐다.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지금도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요르단의 압둘라왕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자신의 아랍군단을 서안(西岸)에 진주시켜 예루살렘의 성지(신예루살렘)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압둘라왕이 양성하는 아랍군단은 아랍권에서도 강군으로 알려진 정예중의 정예다.

▲ 중동지역의 지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ㆍ미국 등 강대국의 자국 중심주의에 따른 이중약속 등이 발단이 됐다.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지금도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무료이미지=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요르단의 압둘라왕이 서안(西岸)을 점령하자, 다른 아랍제국 지도자들은 요르단이 서안을 병합하려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이스라엘 해안지역은 지중해와 맞닿아 요르단이 이 지역을 병합하면 굳이 수에즈 운하를 통하지 않아도 돼 상당한 지정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의구심은 아랍국가 간 불신으로 발전했다. 아랍권은 대 이스라엘 전쟁 수행보다는 요르단 아랍군단의 활동 견제에 주력했다. 전쟁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전투수행이 뒷받침 돼야하는 데, 연합군의 속성상 이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아랍권은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을 완패시킬 수 있는 시기를 놓치게 된다.

내부적으로 아랍진영의 응집력 결여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ㆍ프랑스의 쇠퇴와 미국ㆍ소련의 성장이라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아랍진영의 패배를 불러왔다.

아랍권은 UN 안보리의 정전 권고를 받아들였다가, 사소한 문제로 전쟁을 다시 일으키는 등 전쟁의 기본적인 법칙마저 지키지 못했다.


◇ 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 문제 발생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나라 이름을 요르단하심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바꾸고, 1950년 기어코 서안지역을 자국 영토로 병합시켰다. 압둘라 왕에 의한 서안지역의 병합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아랍민족주의 또는 아랍대의를 배신한 행위로 비춰졌다. 이는 또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압둘라 국왕은 1951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선각자의 한 사람인 하지 아민 후세이니파가 사주한 하수인에 의해서 암살당한다. 압둘라 왕이 병합한 서안지역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측 패배의 영향은 컸다. 90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졸지에 난민이 돼 인접 아랍제국에 흩어졌다. 이것이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이다.

여하간 아랍측 패배는 아랍국민들에게는 정치적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집트는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자유장교단이 파루크 국왕체제를 붕괴시키고 공화국으로 출범하는 계기가 됐다.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한 나세르는 전쟁 패배에 대한 반성과 정치적 각성을 거쳐 이집트혁명으로 발전했고, 이집트는 중동 정치역학의 중심이 된다.


<표. 네차례 중동전쟁 발발시기>

제1차 중동전쟁(1948년 5월16~1949년 2월24)
제2차 중동전쟁(1956년 10월29~1957년 3월)
제3차 중동전쟁(1967년 6월5일~10일)
제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6일~25일)
 
기사입력: 2018/09/08 [16:59]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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