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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홍경래, 정감록 인용 최초의 조직적 항거
민중 저항의 아이콘…봉건적 한계 뛰어넘지 못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10/01 [09:04]

[김쌤’s 한국사] = 홍경래의 봉기(1811년 12월 순조11~1812년 4월 순조12)는 조선 후기 수많은 민중저항 중 최초로 ‘정감록’을 근거로 일어난 조직적 저항이었다. 남부지방의 농민봉기가 가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우발적 반발의 성격인 것과 달리, 홍경래는 10년동안 지지세력을 규합해 조직적으로 정부를 전복하려했던 최초의 봉기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봉기세력의 지도층은 몰락 양반, 향임, 부호 등으로 당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모순이 모두 홍경래의 봉기 속에 녹아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빈농, 임노동자를 규합한 이원적 구조인데다, 지도이념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 등은 한계로 평가받고 있다.

 
▲ 홍경래 봉기군의 점령지(붉은 색).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1. 10년 준비하지만, 열흘만에 수세로 몰려
①주모자 홍경래는 평북 용강군 다미면 출신으로 평양 향시에 합격하나. 대과에 불합격한 낙방수재. 이후 생업을 위해 풍수지리를 익혀, 10년동안 서북지역을 떠돌아다니며 하층민심을 살피고 동료들을 규합.
②홍경래 봉기군의 지도층은 △반란핵심 저항적 지식인(홍경래 김사용 김창시) △봉기자금 조달 현실불만 부호(이희저 김혜철 나대곤) △군사지휘 담당 장사(홍총각 이제초 양시위 김운룡) 등 세 부류이고, 봉기군 가담자는 빈농ㆍ임노동자 등 하층민.
③홍경래(평서대원수, 본대 지휘) 안주 방면, 김사용(부원수) 의주 방면, 이제초 북진군(곽산 정주 선천 철산 용천), 홍총각 남진군(가산 박천 태천), 이희저(도총 都摠 지휘자의 신변 경호), 우군칙(총참모), 김창시(참모) 등이 봉기(1811년 12월18일, 순조11).
④홍총각의 봉기군 선봉대, 가산ㆍ박천ㆍ태천 점령, 이제초의 북진군도 곽산ㆍ정주 점령후 선천ㆍ철산을 거쳐 용천까지 점령(1812년 1월3일). 홍경래군은 점령지역의 토호ㆍ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 기존 행정체계를 이용해 군졸 징발과 군비(군량)조달.
⑤홍경래군은 봉기 10일만에 청천강 이북의 10개고을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요처인 영변에서 내부 의견대립으로 홍경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자, 군사재정비에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전략요충지인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어 곤경. 안주병영의 집사 김대린은 우군칙과 진격형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이 무시당하자, 홍경래군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홍경래를 암습해 부상 입혀(김대린 등 처형).
⑥지도세력의 분열에 따른 홍경래의 부상과, 내부 반란자를 수습 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느라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틈을 타 공격해온 관군과 교전하지만 안주성 공격을 앞두고 박천ㆍ송림 전투에서 참패(12월29일)하고, 그날 밤 정주성으로 퇴각해 전략상 수세에 몰려. 관군은 반란 진압과정에서 양민도 반란군으로 몰아 약탈ㆍ살육을 자행, 이 때문에 박천ㆍ가산의 일반농민들도 관군을 피해 정주성으로 합류.
⑦부원수 김사용의 북진군은 의주 김견신ㆍ허항의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데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관군이 기세를 몰아 추격하자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교전하나 이제초가 전사하는 등 패전. 지휘부, 봉기군을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합류.
⑧정주성의 홍경래군, 서울 파견 순무영(巡撫營) 군사와 지방 관군의 연합부대에 맞서 항전하지만, 결국 진압(1812년 4월19일) 당해. 이때 체포된 인원은 2983명으로, 이중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처형, 반란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서울로 압송 참수.
 
 
2. 지식인 상인 몰락양반 등, 농민층과 결합
①홍경래군의 지도세력은 상인 우군칙ㆍ박천출신 상인 김혜철ㆍ안주출신 상인 나대곤, 명망있는 양반가문 출신 지식인 김사용ㆍ김창시, 역노(驛奴)출신 부호이자 무과 급제 이희저, 평민출신 장사 홍총각ㆍ평양출신 장사 양시위ㆍ영변출신 장사 김운룡, 몰락 향족출신 이제초 등 60여명선.
②홍경래 지도세력은 거사 전 철산의 정경행, 선천의 유문제 등 청천강 이북 명망가와 행정실무자를 포섭해 내응세력으로 삼았고, 이들은 홍경래군에 내응해 봉기 기간 동안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 내응세력은 주로 향임(좌수ㆍ별감ㆍ풍헌 등)과 무임(武任) 중의 부호(별장ㆍ천총ㆍ파총ㆍ별무사 등)로 대부분 납전승향(納錢陞鄕 돈을 주고 향임을 획득한 지방 양반) 계층.
③홍경래군이 초반 10일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는 지휘부(부농ㆍ상인층)와 일반 병졸(소농ㆍ빈농ㆍ유민ㆍ임노동자)이라는 이원적 구조에 따른 내부갈등 때문.
 
 
3. 뿌리깊은 서북지역 차별이 경제성장과 함께 수탈로 나타나
①조선 사대부의 뿌리는 고려 하급관리, 지방 향임 등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북지방은 고구려-수ㆍ당 전쟁, 고려-거란(요)전쟁에 시달렸고, 묘청의 난 이후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신라의 경주 포함)귀족이 득세하면서, 견제를 맡았던 평양세력이 거의 와해된 상황. 후기 들어 몽골의 침략과 지배시기에는 몽골 직할지로 편입(동녕부)당하는 등 양반 계층이 자생하기 어려웠던 여건.
②세종의 4군6진 개척과정에서 시행한 사민정책은 후대(중종 이후)들어 죄인을 서북지방으로 유배하는 형태로 변질.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고 기록.
③여진족 토벌, 사민정책, 명청교체기의 혼란기 속에 전란의 통로였던 서북지방은 성리학적 교양을 지닌 사대부가 성장하기 힘들었고, 이는 중ㆍ후기 들어 문벌을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관직이 있어야만 양반으로 대접하는 풍토 속에서 점차 차별대우 가속화.
④서북지방은 전통있는 양반가문이 없는 대신, 영향력 있는 향임층이 중앙의 집권세력과 결탁, 각종 세금 부과 등에서 일부 협조하거나 저항하면서 성장. 서북지역은 ‘잉류’라 해서 거둔 세금을 중앙에 납부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했는데, 세도정치들어 매관매직이 심해지면서, 서북지역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착취가 극심.
⑤서북지역 부임 지방수령은 ‘매향(賣鄕)’이라는 이름으로 지방의 부호에게 양반(향인)을 강매. 평안도관찰사 심이지는 정주목사 오대익이 4만6849냥을 받고 400여명을 향안에 올렸다고 장계(정조14년 4월15일)했을 정도로 각종 구조적 문제 심화.
⑥관리의 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민초들은 민고(民庫)라 해서, 일종의 기금을 만들었는데, 서북지역은 명ㆍ청으로 떠나는 연행사의 비용을 민고로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고는 지방수령의 사금고 역할도 하면서 점차 수탈을 위한 시스템으로 변모.
⑦홍경래의 봉기 이전 함경도 북청과 단천의 농민봉기(1808년)와 황해도 곡산의 농민봉기는 모두 향임층이 지방수령의 수탈에 주도적으로 저항하면서 발생.
⑧이런 분위기 속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향임층이 적극 가담했기 때문에 청천강 이북 8개고을 석권이 가능. 다만 군사편제가 엄정했던 안주, 의주 등은 함락하지 못했던 것은 상대적으로 향임층의 역할이 크지 않았고, 군사요충지로 관이 통제가 강했기 때문.

기사입력: 2018/10/01 [09:0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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