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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최제우, 새 시대정신 ‘동학’ 창도
깨달음을 얻고(1860년 4월5일), 1년여의 포교에 무리 3000늘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10/04 [09:39]
▲ 최제우. 
[김쌤’s 한국사] = 동학의 창시자로 경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재가녀 한씨(韓氏)다. 재가녀의 자손이라는 굴레 때문에 과거길이 막히고, 재산도 없는 몰락양반이라 평생 불우했던 삶이 동학을 창시한 계기로 작용했다.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 1839년~1842년)과 제2차 중-영전쟁(프랑스도 참여, 1856년~1860년)으로 청이 서양세력에 굴복하자 조선은 일시적으로 서학탄압을 중단한다. 심지어 서양세력이 조선을 침공할 때를 대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주교신자라는 것을 보이려 십자가를 대문밖에 걸어둔 사대부도 있었다.

최제우(崔濟愚 1824년 순조24~1864년 3월10일 고종1)는 청이 서양세력에 굴복한 것을 보고 순망치한으로 조선도 곧 서양세력에 굴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학은 이런 시대적 배경속에 탄생했다.
 
 
1) 후사없던 부친이 뒤늦게 얻은 아들
①아버지 최옥(1762 영조38~1840)은 향시에는 여덟번 급제, 광시사 한번 급제했지만, 서울에서 치르는 복시에서는 계속 낙방했다. 부친(최제우의 조부) 최종하가 사망(1791년)에 이어, 첫부인 정씨도 곧 사망(1791년, 1778년 결혼)하자 1년만에 서씨와 재혼(1798)했다.

②두번째 부인 서씨도 후사없이 사망(1811년)하자, 최옥은 과거를 단념하고 제자양성에만 힘을 기울인다. 이 시기에 여러차례 화재를 만나 가세가 많이 기울어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③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맞아들인 세 번째 부인이 바로 최제우의 생모인 한씨(1793~1833)인데, 당시 최옥의 나이 63세(1824년)였고 한씨의 나이는 30세였다. 문제는 이 한씨가 20세때 남편을 여읜 과부였다는 점 때문에 최제우는 재가녀의 자손은 과거금지라는 족쇄에 얽매인다. 생모 한씨는 최제우가 10살 때 사망하고, 아버지 최옥은 17살 때 사망(1840)한다.

④조선후기는 4대조안에 벼슬을 한 선조가 있어야 양반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향안에 등록가능하고, 이후에야 좌수ㆍ별감 등의 향임을 맡을 수 있었다. 향임정도는 맡고 있어야 향촌에서 나름대로 지배계급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세도정치 등으로 과거시험에도 부정이 횡행하던 때에 이미 기울어진 가세속에서 아버지 최옥도, 아들 최제우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으니 바로 몰락양반이었다.
 
 
2) 극심한 가난 속에 성장한 불우한 수재
①어릴 때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가세는 더욱 기울어졌다. 몰락양반들의 전형적인 코스인 의술, 풍수지리, 서당 훈장 등을 전전하며 장사도 했지만 하나도 신통한 것이 없었다.

②거듭된 실패를 겪고 고향에 돌아온 최제우에게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한 승려가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책을 전했다고 한다. 탑에서 나온 이 책의 내용을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는데, 최제우라면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말과 함께였다.

③책은 “하늘에 기도를 하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최제우는 양산군 천성산의 내원암에서 49일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47일만에 기도를 중단(1856년)했다. 다음 해 적멸굴에서 49일기도를 올리면서 이즈음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개명했다.

④뾰족한 생계 수단없이 수도한답시고 입산-하산을 거듭하는 동안 빚만 늘어, 빚쟁이들의 고소ㆍ고발에 관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빚 독촉을 하던 노인이 행패를 부리자 분한 마음에 노인을 밀쳤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노인의 아들과 사위가 몰려와 난동을 부리자 최제우가 닭털 꼬리를 노인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소생시켰다. 이 사건으로 최제우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뭔가가 있는 사람으로 주변에서 받아들였다.

⑤수도와 수련을 하던 최제우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1860년 4월5일). 최제우는 이후 1년동안 자신의 종교적 체험이 진정한 것인지 확인하며 상제의 가르침을 민중에게 알릴 방법을 강구한다.
 

3)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면서 교단조직 정비
①득도를 확신한 최제우는 자신의 깨달음을 주변에 알리기 시작(1861년)했고,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따랐다. 동학이 세력을 불려나가자 유림층에서는 서학(천주교)을 신봉한다고 의심하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탄압을 피해 최제우는 호남으로 피신한다(1861년 11월).

②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최제우는 <논학문(論學文)> <안심가(安心歌)> <교훈가> <도수사(道修詞)> 등을 저술하며 동학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경주로 다시 돌아온 최제우(1862년 9월)는 포교에 힘써 따르는 무리가 급증했다. 이때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 ‘사술(邪術)로 백성을 현혹시킨다’고 체포했으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 경주진영에서 무리의 위세에 눌려 무죄방면했다.

③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조정에서도 동학의 정당성을 입증한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신도도 더욱 증가했다. 반면 최제우는 신중한 포교 방법을 모색하고, 교단의 조직을 구성한다. 경상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에 13개접소(지방교단, 교단의 책임자는 접주)를 두고 교인은 3000여명(1863년)까지 늘어난다.

④자신이 조정의 요주의 인물로 몰린 것을 알게 된 최제우는 제자 최시형을 북접주로 임명(1863년 7월)하고, 도호 해월(海月)을 선사한다. 직후 도통을 전수하며 해월 최시형을 제2대교주로 선정(1863년 8월14일)했다.

⑤조정은 동학의 교세확장을 막기 위해 선전관(정운구)을 파견, 최제우와 제자 20여명을 경주에서 체포(1863년 11월20일)한다. 서울로 압송 도중 철종의 사망으로 대구감영에 이송(1864년 1월), 대구장대에서 처형당해 사망(1864년 3월10일)한다. 죄목은 사도난정(邪道亂正)이었고, 최제우의 나이 41세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은 당시 최제우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不意四月 心寒身戰 疾不得執症 言不得難狀之際
사월 어느날쯤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언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有何仙語 忽入耳中 驚起探問則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曰勿懼勿恐 世人 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세상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問其所然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曰余亦無功故 生汝世間 敎人此法 勿疑勿疑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曰然則 西道以敎人乎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쳐야합니까?(라고 물으니)

曰不然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기사입력: 2018/10/04 [09:39]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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