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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훈민정음해례본, 창제원리 밝혀
일본 신대문자 모방설 등 억측 일거에 종식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12/10 [06:31]
[김쌤’s 한국사] 훈민정음① =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에 대해 각종 억측과 해석이 분분하다. 소유하게 된 경위, 소유자의 법적 정당성 등과 함께 적절한 보상가격은 얼마인지 등이 모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책이 지닌 막대한 가치 때문이다.

훈민정음 책자는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과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 2권만이 현재 발견돼 전해지고 있다. <훈민정음언해본>은 단행본이 아니고, 세조가 편찬한 <월인석보> 첫 번째권에 실려있는 내용을 일컫는다.
 
 
1) 한글, 획기적ㆍ과학적 창제원리 적용한 문자체계
훈민정음은 만든 사람이 분명(세종)하고, 만든 목적도 명확하며(백성을 위해), 제자원리가 과학적(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이며, 사용인구가 1억명에 이르는 표음문자다. 하나의 글자는 하나의 음가(音價)만을 갖는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역대 문자체계의 독보적 신기원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훈민정음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지만,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종 해석이 분분했다. 특히 각종 해석에서 혼란을 일으킨 부분이 바로 ‘其字倣古篆(옛 글자를 모방)’이라는 다섯자 때문이었다.
일본의 신대문자 모방설, 단군시대부터 사용했다는 가림토문자 모방설,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의 문자 표기 모방설, 심지어 세종이 화장실에서 문고리모양을 보고 만들었다(이덕무 청정관전서)는 설까지 분분했다.
이같은 각종 억측을 한방에 잠재운 것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일본의 신대문자 모방설은 당연히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학자들이 한반도지배 정당성을 뒷받침하며 주장하던 것이었다.
 
 
2) 책의 이름도 <훈민정음>이지만 혼돈 피하기 위해 ‘해례본’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만든(1443년 12월) 한국어의 표기체계(한글)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는 책자, 두 종류가 있다. 통상 책자를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1446년 발간)>이라고 부른다.
 
▲ 한글의 창제원리를 밝힌 책자 <훈민정음>의 일부분인 해례본.     © 경기도민뉴스


원래 책이름은 <훈민정음>이지만 한글과의 구별을 위해, 또 책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부르며, <훈민정음 한문본>,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는 이 <훈민정음해례본>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입수해 공개한 것이 단 한권뿐인 유일한 책자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훈민정음해례본>은 곧 <간송본>을 의미했지만, <상주본>의 발견으로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과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으로 구분한다. 통상적으로는 <간송본>, <상주본>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은 예의편, 해례편, 정인지 서문 3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예의편은 훈민정음의 창제 취지, 새로 만든 글자의 음가, 운용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해례편은 ①신하의 글(다섯 해설과 한 예시가 실려 있다) ②제자해( 글자 창제에 관한 해설) ③초성해(초성 글자에 관한 해설) ④중성해(중성 글자[모음]에 관한 해설 ⑤종성해(종성 글자[받침]에 관한 해설) ⑥합자해(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에 관한 해설) ⑦용자례(글자를 활용한 예시)를 담고 있다.
정인지 서문은 원래 세종이 서문을 쓰기 전에 정인지가 이미 썼던 것으로 ‘원조 서문’이지만 세종이 서문을 쓰면서 신하였던 정인지의 서문이 뒤로 밀려났다. 책의 편집상 말미에 위치하므로 형식적으로는 ‘서문’이 아니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거의 동시에 서문을 쓴 것이므로 그냥 ‘정인지 서문’이라고 한다.
이 정인지 서문에 <훈민정음해례본>을 1446년 음9월(10월)발간(세종28)했다고 밝히고 있다.
 
 
3) 예의, 해례, 정인지서문 중 ‘해례’만 오래토록 미발견
정인지의 서문이 붙어있는 책자 <훈민정음해례본>은 한문으로 지은 것으로 ‘국지어음 이호중국~’이 실려 있다. 반면 <훈민정음언해본(1459년, 세조5)>은 세조의 명으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한글로 번역한 책자로 국지어음 이호중국~을 ‘나라말싸미 듕귁에 달아~’가 실려있다.
 
▲ 세종이 직접 쓴 ‘국지어음 이호중국~’구절은 순한문으로 <훈민정음해례본>에 실려있다.     © 경기도민뉴스

<훈민정음언해본>은 책자의 정식 이름이 아니고, 세조가 간행한 <월인석보> 제1권에 실려있는 내용을 독립해서 부르는 용어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어지(御旨), 음가(音價), 운용(運用), 성음절(聲音節), 방점(傍點), 서문, 예의(例義) 부분을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완전히 번역(언해)해 전국에 배포했다.
서강대학교가 소장한 1459년 초간본 월인석보에 수록되어 있는 <훈민정음언해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초자료 중의 하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글의 창제원리에 대한 설명은 빠져있다.
문화재청은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해례본의 앞머리에 있는 세종대왕 서문과 예의(例義)의 한문 부분만을 번역, 단행본으로 발행했을 것으로 추정(훈민정음언해본)하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보급 노력은 서리들의 시험과목에 훈민정음(세종28년 12월26일 기록)을 채택한 것, 지방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한 것(세종29년 4월20일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훈민정음언해본>은 모두 15장, 30쪽으로, 여러 판본이 있지만 가장 오래 된 것이 <월인석보(서강대학교 소장)> 첫머리에 실려 있는 것이다.
<월인석보> 첫머리의 훈민정음은 제목이 ‘세종어제훈민정음’이며, 제1장 1행부터 4행까지의 글자체가 그 뒤의 것과 다르다. 이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세종이 승하(昇遐, 사망)한 뒤에 간행한<월인석보>의 제목에 세종의 묘호(廟號)를 넣기 위해 변개(變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해례에 밝힌 제자원리, 세계가 경악
<훈민정음해례본>은 예의, 해례, 정인지서문 3편이 있다고 앞서 밝혔다. 이중 예의편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도 같은 내용이 있어서 그 존재를 알았지만, 해례편은 존재를 몰랐다.
통칭 <훈민정음해례본>은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의 이한걸(李漢杰)의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선조 이천(李蕆 1361~1451)이 파저강유역의 여진족을 정벌(1437년 7월)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책자 <훈민정음해례본>은 애초에 많이 인쇄하지 않은 탓인지, 세종 당대에도 희귀했던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인 <훈몽자회(1527년, 중종22)>를 쓴 최세진도 해례본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인용만 했으며,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세속에 전하기를 세종이 변소에서 문살을 보다 깨닫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는 설이 실려 있다.
최근 학계 일부에서는 집권층이 지식의 독점을 위해 <훈민정음해례본>을 의도적으로 폐기했을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4군6진을 개척하는데 공을 세운 노장 이천(이미 76세였다)에게,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해례본>을 전한 것으로 미뤄, 당대에도 많이 출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여하튼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견으로 훈민정음이 발음기관을 본떠 ㄱ, ㄴ, ㄷ 등 자음을 만들고 천지인을 형상화해 모음을 만든 것이 밝혀지면서 전 세계가 그 뛰어난 과학적 원리에 경악한다.

기사입력: 2018/12/10 [06:31]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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