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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상주본, 여백에 한글 연구기록 존재
간송 전형필 선생의 노력으로 해례본 발견 보존 공개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8/12/14 [05:35]
[김쌤’s 한국사] 훈민정음② =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가장 큰 가치는 책의 여백에 연구자의 연구기록이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학계는 조선중기 쯤 한글에 대한 당대의 연구 성과를 알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상주본 공개를 강력하게 바라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 경기 여주 영릉의 세종대왕상.     © 경기도민뉴스

 
1) 문자표기와 발음의 유사성 등 독보적 문자체계
한글의 가장 큰 우수성은 표기와 발음의 유사성이다. 예를 들어 흔히들 ‘소주’를 강조할 때는 ‘쏘주’라고 발음한다. 즉, ‘갈 → 깔 → 칼’, ‘도 → 또 → 토’, ‘바 → 빠 → 파’ 등에서 보이는 발음의 강화 추세와 표기의 일관성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초성을 다시 받침(종성)으로 사용한 것도 놀라우며, 각 자음을 용례에 맞춰 조합해 사용하는 것도 놀랍기 그지없다.(흙, 닭 등) 한글의 또 다른 놀라움 중의 하나는 ‘한 글자가 하나의 음가’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자어 ‘天’의 중국어 발음은 [tiān]으로 글자는 하나지만, 음가는 티안이라는 2개다. 한글은 그냥 [천]으로 발음하면 된다. 영어 SKY는 모음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가는 [스카이]로 3개나 된다.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의 발견으로, 한글이 계통적으로 독립적인 문자체계이며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철학적인 이론을 적용했다는 것이 증명됐다.
 
 
2) 광산김씨 가문에 보관중이던 해례본 발견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은 일제 강점기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李容準)이 1940년 발견했다. 원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로,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김씨 종택인 긍구당 서고에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 한글창제의 주인공 세종이 영면한 경기여주의 영릉.     © 경기도민뉴스


이용준이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을 발견하고 김태준에게 이야기했고, 김태준은 이용준과 함께 안동의 본가로 내려가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을 직접 확인했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의 존재를 밝혔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1000원을 찾아와 1000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고 한다. 당시 1만1000원은 현재가치로는 33억원 정도다.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한글창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책을 일제가 안다면 말살하려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어진 6.25동란기에도 전형필 선생은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을 목숨보다 먼저 챙겼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1956년 전형필 선생이 영인본을 제작하기 위해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을 공개한다.
 
 
3) 상주본, 연구자의 주석있어 학술적 가치 높을 듯
<훈민정음해례본>은 단 한권만 남아서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서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이 발견됐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고서 수집가 배익기씨가 집 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했다며, 안동MBC에 제보하면서 알려진 것이다.

이 발견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이 2권이되기 때문에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과 <훈민정음해례본상주본>으로 각각 부른다. 다만, <훈민정음해례본상주본>은 존재 자체는 확실하지만, 그 책자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훈민정음해례본상주본>은 도굴꾼 서모씨가 1999년 안동 광흥사의 대웅전 나한상 토불들을 부수고 훔친 복장유물이라고 증언한다. 2013년말 안동 광흥사에서 조선 세조시기에 복장한 다수의 관찬 언해본 서적이 발견되면서 <훈민정음해례본상주본>도 이 당시 편찬된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도 판본이 같고 같은 안동지역에서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상주본과 같이 세조시기에 만들어 복장했던 유물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상주본>은 서문 4장과 뒷 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는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보다 좋고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에는 없는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책 귀퉁이에 남아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세종대왕 서문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류통)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를 가지고 서로 흘러 통하지가 않는다)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고우민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몯핧 노미 하니라(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여위치민연 신제이십팔자)
내 이를 위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듧짜랄 맹가노니(내가 이를 위해 가엾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사람마다 해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져 핧 따라미니라(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배워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실록(1443년 12월30일, 세종25)의 기록>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古篆)를 모방하고, 초성(初聲)ㆍ중성(中聲)ㆍ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 글자는 비록 쉽고 간단하지만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한다.

 
기사입력: 2018/12/14 [05:35]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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