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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로마, 식민지 정복전쟁으로 평민권 신장
로마史① 방대한 식민지 값싼 농산물 로마 자영농(평민) 붕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09/22 [07:20]

[김영수 잡학여행] =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로마는 귀족들이 이민족을 쫓아내면서, 왕이 없는 공화정으로 도시국가를 시작한다. 왕이 없다고는 하지만 국정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연합체로 국가를 운영한다.


비록 쫓아냈다고는 하지만, 에트루리아인의 침공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로마는 방어를 위해서라도 병역의 의무를 짊어질 평민을 무시할 수 만은 없었다. 고대의 전쟁은 필요한 물자를 본인이 부담해야했으므로, 평민층은 전쟁을 통해 서서히 발언권을 증대시켜 나간다.

 

▲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Romulus), 레무스(Remus) 형제가 건국했다는 신화를 갖고 있는 로마.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①로마의 건국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이탈리아인들이 남부지방으로 이동해 정착(BC10세기) 이후, 이탈리아인의 한 갈레인 라틴인이 테베레강 하류에 도시국가 로마(BC8세기 중엽, 베르질리우스의 ‘아에네이스’는 로물루스ㆍ레무스 형제가 건국했다고 기록 BC753)를 건설한 것으로 보고 있다.


②건국 이후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던 로마(BC7세기)는 귀족들이 에트루리아인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BC509)한다. 출발부터 왕이 없던 로마는 귀족(시민권), 평민(참정권 없이 병역과 납세의 의무), 예민(귀족의 지배아래 토지경작, 지대납부), 노예(전쟁포로, 부채 노예)의 4개계급이 존재했고, 이중 귀족이 지배계급으로 집정관(2명, 임기1년)과 원로원(300명)을 독점했다.


③로마의 집정관은 정치 경제 군사 등의 권한을 갖는 지도자로 비상시에는 1명이 6개월씩 돌아가며 독재권을 갖는 ‘통령’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상공업 발달로 부를 축적한 평민이 중장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발언권이 높아지면서, 참정권을 요구(BC5세기)하고 병원회(兵員會, 평민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④당시에는 전쟁에 필요한 칼, 창, 갑옷 등의 장비를 전투에 참여하는 평민이 스스로 마련해야 했으므로, 경제적 부담이 막중했다. 그런데도 정작 정치에서 소외받자 불만에 쌓인 평민들은 로마근처에 신도시 건설운동(성산사건, BC494)을 벌인다. 이 사건으로 귀족들과의 타협으로 평민계급의 이익을 대변해줄 2명의 호민관(후에 4~10명으로 증원) 선출권을 획득한다.


⑤평민계급은 자신의 권리를 명확하게 보장받기 위해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BC450)’을 제정하고, 카누레이우스법(BC445)으로 귀족-평민의 통혼(通婚)권도 쟁취한다. 고대사회에서 결혼은 신분상승을 의미하고, 이는 지배계급으로 진입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권리중의 하나다.


⑥평민들의 권리가 커지면서 리키니우스법(BC367)은 집정관 중 1명을 평민에서 선출하고, 귀족의 토지소유 상한(500유게라)제도 규정한다. 이어진 오굴리아법(BC300)으로 평민도 신관(神官)과 공직 취임권을 쟁취한다. 이제 사실상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거의 없어진 셈이다.


⑦이어진 호르텐시우스법(BC287)은 평민회 의결이 원로원 승인없이 효력을 발생(입법권 획득)하도록 했다. 법적으로도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⑧평민 중심의 중장보병으로 주변을 정복한 로마는 △식민시(군대 주둔) △자치시(군사권과 사법권 제외) △동맹시(군사권 제외)로 정복지역을 관리한다.
이같은 로마의 독특한 정복지 관리는 훗날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군벌(카이사르)의 등장과 대농장(라티푼디움)을 소유한 지주계급의 등장으로 평민층의 몰락을 불러오게 된다. 평민층의 몰락은 국가세입과 병역 자원의 감소로 이어져, 이민족 용병(주로 게르만족)에게 국경을 맡기게 되고 결국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서로마, 476)에게 멸망당하는 최후를 맞는다.


⑨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로마에서 평민은 자신의 권리를 법에 의해 보장받으려 했다. 당시의 법원(法院)은 귀족들이 독점해, 명확한 기준과 근거없이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비록 법적으로는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상황에서 고대 로마가 완전한 평등을 이룰리는 없다.

 

▲ 로마의 상징중의 하나인 콜로세움. 실상은 정치가들의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산물이기도 하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⑩당시 로마의 고급관직은 명예직으로 봉급이 없고, 주로 선거를 통해 이뤄지므로 돈이 없으면 표를 얻지 못해 보통의 평민은 지배계층으로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지배계급에 결원이 생기면 같은 구성원이 추천한 사람에 대해 민회는 찬반 정도만 표시하는 것이었으므로 군사령관, 식민지 총독 등 주요관직은 유력가문이 거의 세습했다.


⑪다만, 로마의 주요 결정(선거, 입법 등)은 모두 민회의 권한이었으므로 유력 정치가는 평민계급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고대의 다른 나라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왔는데 평민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력자들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검투사는 바로 도시빈민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위정자들의 오락거리 제공이었고 전형적인 포퓰리즘이었다.


⑫제2차 포에니 전쟁​(BC218~BC202)의 승전으로 막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게 된 로마는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 유입, 대지주계급의 거대농장 운영 등으로 자영농이 몰락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가 귀족의 토지소유 제한과 평민에게 토지분배 등의 개혁(BC133~BC123)을 시도하지만, 기득권층(원로원)의 반발로 살해당하면서 개혁을 이루지 못한다.


⑬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몰락농민의 도시유입으로 로마는 어떤 형태로는 자영농이자 평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국가 존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위기를 맞는다. 또 식민정복전쟁, 이민족의 침입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군대를 통한 걸출한 인물들이 정치지도자로 떠오른다. 이중 대표적인 사람이 평민출신의 전쟁영웅으로 호민관에 7연임한 마리우스(Marius 평민파, 카이사르의 고모부)다. 평민파 마리우스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벌열파 술라(Sulla)의 대립 속에서 해외 전쟁터로 도망쳤던 카이사르가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로마로 귀국하자, 로마는 카이사르를 열렬히 환영하기에 이른다.


⑭로마사에서 카이사르를 제정의 시초로 보는 것은 비록 황제에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제정(帝政)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복잡한 내부문제 해결(도시빈민, 빈부격차 등)과 다양한 식민지(동맹시, 이민족 등)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는 일정 정도 초법적인 존재인 황제가 ‘칙령’으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제국’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 12표법(Lex XII Tabularum)
귀족들의 판결에 불만을 가진 평민들은 10인(decemviri)위원회를 만들어 법전을 편찬, 광장에 법전을 게시(BC450)해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12표법은 △귀족계급과 가부장의 특권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고 △민사에 종교적 관습 개입 △유언할 권리 △계약의 자유로움(당시 활발한 무역을 하던 로마의 상관습을 반영) 등을 규정했다.

 

간략한 로마제국 흥망사

서양에서 현대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를 꼽으라면, ‘로마(ROME)’를 빼놓을 수 없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형제가 건국했다는 이 나라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여기서는 △로마의 법제정 연혁, 의의,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카이사르(BC100~BC44) △포에니 전쟁 △동서제국의 분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기사입력: 2020/09/22 [07:20]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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