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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기관총 때문에 나타난 참호전과 탱크
독가스 살포 등 전투방식 변화, 돌격소총 필요성 제기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1/01/21 [07:10]

[김영수 잡학여행] = 기관총(machine gun)은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한 총기류로 20mm 미만의 구경을 갖는다. 인류 최초의 기관총은 개틀링 박사(Richard Jordan Gatling, 1818년 9월12일~1903년 2월26일)가 남북전쟁 중 개발했다.


이 기관총을 보유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은 확연한 전투력의 차이를 드러낸다. 독가스 공격, 참호, 탱크 등은 모두 기관총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해 제국주의자들은 기관총을 앞세웠고, 세계적으로 학살이 일어났다.

 


1) 개틀링, 총열을 묶어 연발사격 가능
①기관총은 개별적으로 발전해 온 뇌관, 금속제 탄피, 탄창 등의 발명에 힘입은 것으로 19세기 미국에서는 개인 차원의 발명가들이 이런저런 형태의 기관총을 발명했었다. 그중 가장 실용적인 것이 바로 개틀링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당시 버지니아의 7일전투(1862년 6월25일~7월1일)에서 남군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②여러 개의 총열을 묶어 기계식 크랭크장치를 손으로 돌려가며, 총열이 회전하면서 연발사격이 가능한 개틀링 기관총은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기관총이라 할만했다.
③크랭크장치로 총열이 회전하는 동안 자동으로 총알을 장전, 사격의 편의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자동차없이 우마차로 운반하던 당시에는 너무 무거웠다. 또 사수가 적정한 회전력으로 크랭크를 돌려야하는데, 전장의 흥분 상황에서 크랭크를 너무 빨리 돌리는 바람에 작동불능 등의 상태가 빈번하면서 실제 전투에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갑오농민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우금치에서 농민군이 학살수준의 도륙을 당한 이유가 바로 일제의 기관총때문이었다.

 



2) 맥심, 화약폭발 가스로 최초의 자동 재장전 기관총
①기관총의 획기적 발전은 무연화약의 발명이 이뤄지면서부터다. 조선의 변급 신유가 나선정벌에서 조총으로 위력을 발휘했다지만, 나폴레옹시대까지 총기류의 약점 중 하나는 연기였다. 한발을 발사하고 나면, 화약의 연기 때문에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②무연화약은 이전까지의 흑색화약이 지니고 있던 연기의 발생을 거의 없앴다. 화약의 폭발력을 오롯이 가스의 압력으로 총알을 발사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정거리도 늘어났다. 또 총을 발사할 때의 반동을 이용해 볼트를 작동, 사용한 탄피를 배출하고, 탄창에서 총탄을 자동으로 재장전할 수 있도록 무기를 설계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하이럼 스티븐스 맥심(1840년 2월5일~1916년 11월24일)이었다.
맥심 기관총(1884년)의 발명에 이어 호치키스, 루이스, 브라우닝, 매드센, 모제르 등 여러 종류의 기관총이 잇달아 나타났다.

 



3) 기관총, 적의 대규모 돌격 저지에 효과적
①기관총의 발명은 전투의 양상을 바꿔놓았다. 이전까지의 전투는 군악대의 연주속에 화려한 군복을 입은 군인이 위풍당당하고 질서정연하게 적진으로 진군하는 방식이었다. 총구로부터 총알을 장전하는 전방장전방식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아 대열행군이 가능했지만, 총기의 발전으로 명중률이 높아지자 이같은 대열행군방식의 전투는 자멸이라는 것이 전투에서 입증되면서 군복의 색상도 바뀌기 시작한다.
②남북전쟁부터는 적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진지에 철조망을 두르고, 참호속에서 적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는 전술이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나타난다. 참호전이 확고한 전술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바로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이었고, 제1차세계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이었다.
③흔히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크리스마스(1914년 12월24일)를 맞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캐롤을 부르며 비공식적으로 잠시 휴전을 한 것도 바로 기관총을 사용한 참호전의 가혹한 전투방식 때문이었다.
지루한 참호전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양측 군대가 지휘부의 허락도 없이 짧은 비공식 휴전을 가졌던 것은 적군이나, 아군이나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④기관총 때문에 진격할 수 없는 군대가 맞붙어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보급이 문제로 떠올랐다. 보급이 엉망이니, 병사들의 건강이 떨어지고 사기저하로 이어졌다.
적을 압도하기 위해 독가스를 살포한 것도, 상대방에게 돌진하기 위한 무기의 필요에 의해 탱크를 발명한 것도 모두 기관총때문이었다.

 



4) 기관총, 연발사격으로 적을 압도하기 위한 욕망
①화약의 등장으로 인류는 연발사격에 대한 집념으로 비록 총통이기는 하지만 삼안총(3개의 총열을 하나로 묶어 미리 장전한 것을 연발로 사격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기는 한다.
​②기관총의 최초의 원시적 개념은 대체로 제임스 퍼클 건(James Puckle Gun)으로 본다. 제임스 퍼클은 당시 칼, 도끼 등으로 무장하고 숙련 머스켓사수로 조합된 해상전투에서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리볼버식 연발총의 개념을 생각(1718년)해낸다.
③회전식 탄창에 총알을 미리 장전하고, 하나의 총구에 맞물리는 리볼버식 연발총은 현재도 사용하는 방식이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구현하기가 쉽지 않아 실용화에 이르지는 못한다.
④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대포를 소형화한 총을 만들어냈고, 적을 압도하기 위한 기관총을 발명한다. 이제 남은 것은 기관총의 장점을 개인용 화기인 총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흔히들 ‘돌격소총’이라고 부르는 개인용화기는 제2차세계대전을 맞아 발전하기 시작한다.

 

▲ 조선의 무기중 하나인 삼안총(三眼銃, 삼혈총三穴銃이라고도 한다) 보물 제884호(지정 1986년 11월29일).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1/01/21 [07:10]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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