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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발해, 끈질긴 부흥운동과 저항
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고욕의 부흥, 대발해국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1/02/25 [07:46]

[김쌤’s 한국사] =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698)하기에 이른다. 발해는 선왕(9세기)이후 쇠퇴기를 맞으면서, 신흥세력 거란과 요동지역의 패권을 두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10세기)이었다.
몽골의 한갈레인 거란족(키탄 Qitan)은 야율아보기(?~926)라는 영웅이 부족을 통합, 나라를 건국(916)하고, 발해의 요양지역으로 진출(918)한다.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인 요(거란)의 강력한 지배 속에서 발해유민은 다섯차례 부흥운동을 시도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이다.

 


1)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 출현
①거란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의 청천강까지 도달, 고려와 국경을 맞닿게 된다. 학계는 발해와 요의 충돌기(900년대초~918년), 요의 발해 압박기(919~924), 요에 의한 발해멸망기(924~926)로도 시대를 나누고 있다.
②20여년간 발해와 요의 전쟁에서 발해는 초기 요동지역을 상실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발해는 여전히 요에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
③기록(요사遼史,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문서 등)에 따르면 발해는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입을 격파(919)한 적도 있고,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락(924. 5)하고,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오기도 했다.
④발해가 급격하게 무너진 것은 대체적으로 924년 여름부터인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 중 장군 등 관직출신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발해 내부에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⑤발해의 내분은 거란(요)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때마침 몽골원정을 다녀온 야율아보기는 즉각 대대적인 발해침공(925.12)을 단행, 부여성에서 발해정예병을 궤멸시키고 상경용천부 인근의 발해군도 격파한다.
⑥당시 부여성을 지키던 도독 대문진은 왕권다툼으로 상경(발해의 수도)으로 자리를 비웠고 지도자가 없던 수적 열세였던 부여성은 거란에게 함락당한다. 경악한 발해는 지원군을 보내지만 역시 격파당한다.
⑦야율아보기는 상경용천부를 포위하고 대인선(大諲譔 발해15대 재위 907?∼926)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해에 야율아보기도 사망한다.
⑧발해군은 신흥 요군에 격파당했지만, 장령부의 발해군은 서경압록부로 진격하려던 요군의 발목을 잡는 등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발해부흥운동으로 이어진 원동력이 됐다.

 

▲ 발해 부흥운동의 권역.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2) 거란, 괴뢰국 동란국(東丹國, 926~936) 건국
①발해를 무너뜨린 요는 발해유민을 통치하기 위해 동만주 헤이룽장성 무단장(목단강)에 동란국(동단국)을 설치(926)한다. 동란국은 아율아보기의 아들 아율배가 통치했다.
②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왕 대인선을 포로로 삼아 귀환 중 황제 야율아보기가 사망한다. 함께 원정에 나섰던 동란왕 야율배는 야율아보기의 유해와 함께 본국으로 귀환하고, 옛 발해지역은 허울만 남은 동란국은 권력공백지역으로 남았다.
③신흥제국 요는 야율아보기의 또 다른 두 아들(돌욕, 덕광)중 덕광이 어머니 술율평의 강력한 지지로 황위를 잇고 후당의 실력자 석경당의 요청에 따라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이라는 요의 위성국가 건국을 지원(댓가는 연운16주)한다.
④형제간 권력다툼에서 일찌감치 변방 동란국으로 밀려난 야율배는 제 한몸 건사에 급급하고, 야율배의 아들이 동란국을 이어받지만, 북방의 실력자로 성장한 거란제국에 합병(936)당한다.

 

 

3) 후발해-정안국, 옛 발해지역 유민 통솔
①발해부흥운동의 중심은 발해왕 대인선의 동생(이름 미상)이었다. 당시 장령부의 발해세력은 여전히 강력했고, 발해는 멸망했다고 하지만 지방은 여전히 발해세력이 남아있었다. 특히 압록강 유역은 대씨들이 여전히 지배세력으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②이런 상황에서 거란이 사민정책의 필요성에 따라 동란국을 요양(遼陽)으로 옮기자(928), 대인선의 동생이 홀한성(忽汗城 상경용천부)에 들어가 대광현을 몰아내고, 발해국의 부흥을 선언하여, 후발해(대조영의 발해와 구별하기 위해 ‘후’를 붙인 것, 중국등에 보낸 국서는 발해로 표기하고 있다)를 세웠다(929?).
③후발해는 몇차례 ‘발해’라는 국명으로 일본과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는 등 활발한 움직임(929~936)을 보이지만 한동안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기록이 없어 발해 내부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발해유민은 ‘정안국(定安國)’이라는 국명(국왕은 열만화)으로 송에 사신을 보낸다(970).
④후발해의 지도세력이 대씨에서 열씨로 넘어갔고, 나라의 이름도 바뀐 것인데, 국명을 ‘편안하고 안전한 나라’라고 명명한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내부에 뭔가 심각한 사정이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대광현이 수만 무리를 이끌고 고려(934. 7 태조17)에 귀부 △발해인 박승이 3000호를 이끌고 고려 귀부(938) 등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발해호족 최오사도 후주로 망명(954)하고, 이후 발해인 수만명이 고려로 귀부(979 경종4)했다는 것에서 당초 이질적인 집단이 이원적 연합정권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않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⑤이후 정안국은 송에 보낸 국서(981)에 국명은 유지하지만 국왕의 이름은 오현명(烏玄明)으로 표기한다. 열만화의 성씨는 원래 오(烏)씨이므로, 자연스러운 왕권승계라는 설과 정변으로 지배세력의 성씨가 바뀌었다는 설이 대립한다.

 

 

4) 흥요국(1029), 대발해국(1116) 잠깐 존속
①정안국이 송에 사신을 파견할 무렵은 거란이 연운16주를 차지하고 자신의 위성국가 후진을 멸망(946)시키며 하북을 점령한 강성기였다. 송태조 조광윤은 5대의 혼란을 끝내고 송을 건국(960)하지만, 건국 초기 국가체제 수립과 서하의 반란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②이때 정안국이 송-고려–여진과 손잡고 거란을 적대시하자 거란은 1차침공(983~984), 2차침공(985~986)을 단행한다. 2차침공때 거란은 포로 10만과 말 20만필을 노획, 사실상 정안국은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지 못한다(1003? 멸망).​
③정안국은 열만화(재위 938?~976?)에 이어 오현명(재위 976?~986? 연호 원흥元興)으로 이어지는 짧은 시기 존재했다. 거란은 발해 유민집단을 정리하자 고려를 침입(1차침입 993, 서희가 담판으로 격퇴)하기도 한다.
④정안국 멸망 이후에도 발해귀족 출신 오소경은 올야국(995~1114)을 건국하지만 거란에 항복하고, 발해왕족 출신 대연림이 흥요국(1029~1030)을 건국하지만 역시 거란에 멸망당한다.
⑤흥요국(興遼國) 은 발해시조 대조영의 7대손 대연림이 거란의 동경유수 부마도위가 폭정을 일삼자 봉기(1029), 흥요국 건국(1029년 8월3일). 연호 천경(天慶 또는 天興).
⑥대연림, 대부승(大府丞) 고길덕을 고려에 보내 지원 요청(1029년 9월), 곽원(郭元)의 지원주장에 고려지원병 보내지만 거란 수비군에 패배, 철수. 발해왕족 출신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 여진족 구성원 군대로 요와 전투, 패배.
⑦흥요국, 거란의 침략에 고려에 지원요청(1029년 12월, 1030년 1월)하지만 고려 거절. 흥요국, 거란 공격에 장군 양상세(楊祥世)가 성문 열고 투항(1030년 8월).
⑧발해귀족 출신 고영창도 대발해국(대원국 1116. 1~5)를 건국하지만, 이번에는 여진(금)에 멸망당한다. 대발해국은 대원국이라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기록하고 있다.
⑨고영창의 건국 이전에 여진은 완안아구타(完顔阿骨打) 중심 금(金) 건국(1115년)하자, 거란 70만대군으로 공격하지만, 여진 아골타의 2만에 참패.
⑩거란(요), 고영창에게 발해유민 기병부대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 2000으로 동경의 여진방어 명령내리지만, 고영창은 발해무용마군 중심 봉기. 동경유수 소보선 살해, 동경 점거후 대발해국 건국하고 황제 자칭.
⑪거란군 공격에 대발해국 고영창, 여진의 금에 동맹 요청하지만 거절(황제를 참칭한 것을 거절 명분)당하고 고영창, 기병 5000으로 요양의 남쪽 수산에서 여진의 금과 전투, 패배(1116년 5월)
⑫발해의 근거지와 뚝 떨어진 거란의 상경임황부(내몽골)에서도 고욕(古欲)이라는 발해유민 출신이 요주(饒州)에서 발해부흥운동(1115. 2)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왕이라고 칭한다. 거란은 두차례 실패 끝에 진압(1115. 6)한다.

후발해(929?~970?), 정안국(970?~1003?), 흥요국(1029~1030), 고욕의 부흥운동(1115년), 대발해국(1116년)

※고욕은 발해유민과 주변세력을 결집해 발해 부흥을 내세우고, 대왕을 자처했지만, 정식국호를 내세웠는지는 불분명.
※발해국(929?~970?)과 정안국은 동일한 국가가 집권세력이 바뀌면서 명칭도 바꿨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아 규명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
※발해 잔존세력 오사국(烏舍國)은 발해 귀족가문 오(烏)씨가 건국, 피지배층은 여진족(올야부족 兀惹部)이며 오사국의 수도는 오사성(烏舍城)으로 대략 러시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추정.
요사는 발해의 부여부에서 거란에 반란을 일으켰던 발해유민들이 올야성(兀惹城) 혹은 오사성으로 달아나 오사국을 세웠다고 기록(975년).
여진족이 국왕 오소경과 가족을 붙잡아 거란에 넘겨(1004년)주고, 철리국(鐵利國)에서 오사국 100을 포로로 잡아서 거란으로 보냈다(1012년). 금이 거란을 공략하면서 오사국을 병탄했다(1114년) 등 기록.

기사입력: 2021/02/25 [07:46]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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