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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한반도 최악의 군주 고려 충혜왕
왕비 덕녕공주(원), 충혜왕 사후 숱한 남성 행각
충혜왕의 난봉돕던 강윤충 후손이 신덕왕후 강씨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1/11/22 [08:47]

[김쌤’s 한국사] = 무신정권에 휘둘리던 고려왕실은 차라리 원(몽골)의 힘을 빌려 무신들을 정리하려고 마음먹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고려 원종, 세자 충렬과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원에 요청(1271/원종12)하고 성사시킨다.

 

▲ 고려 충혜왕의 막장행각을 다룬 SBS의 드라마 한 장면.     © 경기도민뉴스

 

 

1) 총명하지만, 엽색행각에만 치중

이후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왕실은 원 황실과 묘하게 엮이면서 혼란했던 국제정세와 맞물리기 시작한다.

이때 국가와 백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 혼자, 내 한몸만 모든 것을 누리겠다’는 유일신(唯一身)의 막장 국왕이 등극하니, 바로 악명높은 충혜왕(1315~1344)이다.

1차즉위(1330년∼1332년)에 이은 2차즉위(1339년∼1344년)동안 자신의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제는 신경을 썼다. 심지어 본인이 주동이 돼 사무역(밀수)도 했다.

한반도 최악의 군주라고들 흔히 말한다. 일국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백성(小民)이 기뻐할 정도였으니, 충혜왕이 얼마나 많은 패악을 저질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5년(1344년)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유배지로 가는 함거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게양까지 가지 못하고 악양현에서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는 참요가 유행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이 노래의 앞구절을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으로 악양에서 죽을 재난을 만났다고 풀이했다.

 

 

2) 새어머니도 강간한 인간 막장

△5월 병인일,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8월 갑오일,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복위 2년 3월 초하루,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 죽였다.

△같은해 8월에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고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관하였으며,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의 아우 금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하였다.

 

 

3) 왕비 덕녕공주도 이해못할 남성행각 벌여

충혜왕이 엽색패륜의 막장짓을 벌일 때, 그 옆에서 서포트해주던 인물이 바로 강윤충이다. 강윤충의 후손이 바로 이성계가 계비로 맞아들인 신덕왕후 강씨다.

강윤충은 처음 벌을 받은 것도 강간죄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충혜왕 사후 자신이 모셨던(또는 난봉짓을 함께 했던) 충혜왕비 덕녕공주(원황실의 공주)를 강간한다.

이 덕녕공주가 자신을 강간한 강윤충을 벌주기는커녕 오히려 총애하고, 수많은 남성과 엽색행각을 벌이니, 충혜왕-덕녕공주 커플은 한반도 최악의 패륜커플로 등극한다.

 

강윤충은 우여곡절을 거쳐 공민왕(1354, 공민왕3)때 찬성사,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르지만 호군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얼자(孽子) 석기(釋器)를 내세운 반역(1356, 공민왕5)과 관련, 결국 살해(1359, 공민왕8)당한다.

 

충혜왕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총명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재능을 사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어찌보면 원황실의 부마국이라는 주체성의 상실이 고려의 국왕들을 정신적으로 고통으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충혜왕은 원에 있을 때 몽골의 귀족 출신 덕령공주와 결혼(1330. 3월, 충숙왕17)하고 고려에 귀국해 왕에 올랐다.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충렬(1차즉위 1274~1298, 2차즉위 1299~1308)

△충선(1차즉위 1298~1299, 2차즉위 1308~1313)

△충숙(1차즉위 1313~1330, 2차즉위 1332~1339)

△충혜(1차즉위 1330~1332, 2차즉위 1339~1344)

 

네명의 왕이 연속 왕에서 물러나거나, 쫓겨났다가 다시 왕위에 오르는 보기드문 광경이 벌어진다. 이유는 몽골의 입김 때문이었다. 특히 충혜왕의 아버지 충숙왕은 자신의 사촌 심양왕 왕고와 정치적 갈등으로 물러난다.

 

▲ 봉은사 청동은입사 향완(보물 제321호, 지정 1963년 1월21일). 몸체에 명문 103자를 은입사로 새겼다. 이 명문에 ‘지정사년’이라고 제작시기를 밝혀 고려 충혜왕 5년(1334)에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다.     © 경기도민뉴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충혜왕은 왕에 오르자마자(16살이었다), 오직 여색을 즐긴다. 놀려면 돈이 필요한 법이라, 오직 자신의 환락을 위해 충혜왕은 고려의 경제를 개혁(?)한다.

중고등 한국사 교과서에는 충혜왕을 소개하지 않지만(왕으로 내세울만한 일이 워낙 없다)

①화폐가치가 너무 높아 통용되지 않던 은병(銀甁)을 없애고, 소은병(오종포 15필의 가치)을 통용(1331)시킨다.

②이학도감(吏學都監, 관리양성기관)을 설치했고, 5도에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해 직접 소금을 생산하지만 곧 폐지한다.

③권문세족에게까지 세금을 물려 지배층의 반발을 부르고, 온갖 실정(失政)이 더해져 결국 원으로 소환당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주티무르, 조고이 등이 원에게 “고려가 요양행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대청도에 유배된 타권첩목이(원명종의 태자, 순종)를 황제로 세우려 한다”고 무고한 때문이었다.

원은 말썽만 부리는 충혜왕을 소환하고, 충숙왕을 복위시키기로 결정(1332년 2월), 충혜왕은 원황실로 돌아간다.

즉위 2년동안 수많은 사건을 벌이자, 고려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나 원으로 소환당한다. 그러나 7년만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려왕으로 복위해 5년간 온갖 패악을 행한다.

④아버지 충숙왕은 고려왕으로 복위 임명을 받았지만, 고려로 돌아가지 않고 1년 이상이나 연경에서 머뭇거리다가, 원의 재촉으로 할 수없이 고려로 귀국하지만, 사냥만 하면서 지내다가 사망(1339년 3월)한다.

원에서도 끊임없이 주색을 일삼은 충혜왕을 포기했는지, 고려에 돌려보낸다(1336년 12월). 고려에 돌아온 충혜왕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충숙왕은 전국을 떠돌며 사냥으로 소일중이었다.

⑤왕위를 물려받았다고는 하지만, 국새(國璽)를 받지 못해 정식 왕은 아니었다. 국새가 없어 정식 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왕은 왕이었고, 여색을 즐기는 천성은 숨길 수 없어 아버지의 계비(새어머니) 경화공주를 강간(1339년 9월)한다.

⑥치욕을 당한 경화공주는 심왕파 조적을 불러, 충혜왕 제거를 부탁하지만 조적은 오히려 죽음을 당한다. 경화공주의 강간사건이 묻히고, 원은 국새를 충혜왕에게 전달(1339년 11월), 충혜왕은 정식 고려왕에 오른다.

⑦이때 국새를 전하러 온 원나라 사신 두린에게, 경화공주가 다시 충혜왕에게 강간당한 것을 알려, 원나라 사신 두린은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한다. 원에 압송당한 충혜왕을 살려준 것은 원황실 내부의 정치문제였다. 심왕과 절친한 원의 재상 바얀이 실각당하자, 원은 충혜왕을 다시 고려로 보낸다.

⑧ 고려왕으로 다시 복위(1339)하자 의성창, 덕천창, 보흥창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어(1342) 직접 돈을 벌었다. 유흥비 마련을 위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측근(강윤충, 배전, 송명리 등)들의 충성을 유지하려면 역시 돈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⑨두차례나 원으로 압송당했던 충혜왕은 쫓겨나기 직전(1343),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 당연히 백성들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원으로 소환당하는 계기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비둘기를 잡는다고 밤중에 민천사라는 절의 누각에 올라가는 소동을 벌이다가 횃불이 옮겨 붙어 누각을 태우기도 했다(1343).

⑩원에 있던 부원배(고려 입장에서는 역적이자 매국노) 이예, 조익청, 기철 등이 차라리 고려를 직할지로 삼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상소문(고자질)이 드디어 원황실을 움직여, 원은 충혜왕을 세 번째 압송한다.

압송당한 충혜왕이 귀양길에 사망하면서 충혜왕비 덕령공주가 고려왕실의 실권자로 떠오른다. 이 덕령공주를 강윤충 등이 강간하면서 고려정국은 또다시 꼬여간다.

 

기사입력: 2021/11/22 [08:47]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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