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영 세상만사] = 예부터 우리나라는 해 뜨는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며 예와 예절을 높이 평가받아 왔다. 고대 중국의 공자도 자기의 평생소원이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예절과 예의를 칭찬했다 한다. 그중에서 효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효도를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부모님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여 가정 내 평화를 유지하는 데 노력해왔다.
효도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먼저,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 부모님의 의사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나아가 부모님의 몸을 봉양하여 무언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며 부모님의 기준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그들의 노력과 헌신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상호 간의 사랑과 존경을 나눌 수 있다. 효도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맹목적인 효도는 주관이나 원칙없이 덮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하지만, 단순히 의무적인 행위로 전락하면서 맹목적인 효도로 변한다. 효는 부모에 대한 복종이나 봉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간언도 있어야 맹목적인 효도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맹목적인 사랑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부모가 병들어 병원 신세를 지면서 그동안 축적해 놓았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은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더욱이 부모가 마련한 재산만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비롯하여 일가친척의 재산도 축내면서 끝까지 병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빚만 남기고 떠나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물론 마지막까지 살려보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에 대한 후유증은 고스란히 남겨진 사람의 몫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병석에 있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치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환자의 안위와 상관없이 감당하기 어려운 치료비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부담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젊거나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응급실에 실려 가면 병원에서는 무조건 링거를 연결하고, 생명줄을 주입하는 것이 일상이다. 물론 의술이 발달한 요즈음에 불치의 병도 치료하여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보호자나 환자의 발목을 잡는 경우도 많다.
암 환자의 경우를 돌아보자. 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결정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은 오직 본인만이 할 수 있으며, 그 결정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이유는, 먼저 연명치료의 비용이 많고, 그에 비해 효과가 미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치료 자체가 무의미함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많은 경우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치료보다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은 연명치료를 통해 연장되는 삶이 의미없다고 느끼는 경우, 당사자는 자신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남은 시간을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는 생각도 있다. 이는 자신 삶과 죽음을 존엄하게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는 자신 삶과 죽음에 대한 스스로 통제권을 갖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이며, 자신의 결정을 존중받고 싶은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환자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청과 공감, 개방적인 대화, 전문가의 도움, 일상적인 지원, 자신의 감정관리를 통해 가족들이 환자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지지할 수 있도록 함이 중요하다. 맹목적인 효도와 사랑에 앞서 환자의 의지를 존중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환자의 입장 이해와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들은 환자의 입장을 고려한 지지가 필요하다. 맹목적인 효도와 사랑으로 무조건 의술에 의존하는 경우는 도리어 말 못하는 환자의 고통을 가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록 말 못하는 환자이지만, 가족의 염려와 고통에 대해 느끼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아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되뇌면서 고통 속에 연명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삶은 서로의 고통만 가중될 뿐 가족이나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폐한 삶을 초래하게 된다. 존엄한 삶을 영위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마음가짐이 모두를 위한 고귀한 삶이라 할 것이다.
최무영 (이학박사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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