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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최무선, 화약으로 왜구를 물리치다
진포대첩, 세계 최초로 화포를 사용한 해전의 승리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9/10/21 [08:01]

[김쌤’s 한국사] = 고려에 출몰했던 왜구는 통상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1274년, 1281년)하기 전인 ‘13세기 왜구’와 1350년 이후 ‘후기 왜구’로 구분한다.


왜구의 고려침략은 점점 그 피해가 커져 △1323년 6월(충숙왕10) 군산도에 침입,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습격해 조세미 약탈 △고려사 1350년 2월(충정왕 2)기사에는 ‘왜구가 고성ㆍ죽말ㆍ거제에 침입하자 합포천호 최선(崔禅)과 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격파하고 300여명의 적을 죽였다. 왜구가 우리나라에 침입한 것이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 고려 후기, 내우외환으로 왜구격퇴 역량 미흡
①고려가 왜구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고려가 처한 국내외적 상황에 따른 것이다.
②고려 충정왕(1338~1352, 재위 1348~1351)이 즉위하지만 권문세족과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원은 충정왕을 폐위(1351년)하고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을 즉위하도록 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개혁을 추진했으나, 내란과 외침으로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③공민왕때의 주요사건만 따져도 △조일신의 난(1352년 9월29일~10월4일, 공민왕 원년) △원의 군사 파견 요청(고려종정군, 1354년, 공민왕3) △제주 목호의 난(1356년, 공민왕5) △4만 홍건적의 침략(1359년, 공민왕8) △10만 홍건적의 재침략(1361, 공민왕10)으로 개경(34일만에) 함락, 공민왕은 복주[경상북도 안동] 피난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세명의 장수가 모략으로 살해당하는 3원수모살사건(1362년, 공민왕11) △공민왕 암살기도 흥왕사의 난(1363년, 공민왕12)에 이은 덕흥군(충선왕의 셋째아들로 원의 사주를 받아 고려 침략)의 침입이 이어졌다.
④여기에 신돈이 집권(1365년~1371년, 공민왕14~20)하는 동안, 왜구 격퇴의 선봉장이었던 최영이 실각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방어책을 수립하지 못했다.

 

 

2)고려, 해상에서 왜구 격퇴 전략 수립
①고려의 왜구침략대책은 최영이 정계에 복귀(1371년, 공민왕20)하고, 6도도순찰사(1372년10월, 공민왕22)로, 6도도통사(1373년, 공민왕23)로 임명받은 후 수군강화 정책을 추진한다.
②최영은 수군강화를 위해 군호(軍戸)를 등록하고, 전함을 건조하고, 왜구를 제대로 막지 못한 지휘관을 강력히 처벌하는 강경책을 폈다. 최영의 수군강화정책은 6도도통사가 된 바로 그해(1373년, 공민왕23) 전함 314척, 수군 2만5600명의 병력을 양성하는 성과를 일궜다.

③고려는 각도에서 2800명의 승려를 동원해 승군을 조직(1377년 3월, 우왕3)하고, 100명의 선장(船匠)을 뽑아 전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며, 판군기감사 이광보(李光甫)에게 용진[강화도]의 전함 건조를 지휘ㆍ감독(1377년 4월)하도록 했다.
④고려는 최영에게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임(1380년, 우왕6)하도록 하면서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했고,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진포대첩(鎮浦大捷)을 이끌어냈다.
⑤바다에서 싸워야하는 수군은 근무여건이 가혹하고,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워서, 고려말과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신량역천(칠반천역)’으로 지정될 정도로 일반 백성들이 꺼리는 직역이었다. 따라서 수군 육성은 일반적으로 육군을 육성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국가재정부담, 직역을 맡은 백성들의 저항, 병선 건조, 수군에 맞는 무기의 개발 등으로 힘들었다.

 

▲ 조선의 총통. 고려 최무선으로부터 시작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해전의 필수무기 중의 하나가 됐다.     © 경기도민뉴스

 

 

3) 세계 최초 화포로 진포의 왜구 토벌
①여러 기록을 참조했을 때 1만이상의 왜구가 500척 규모의 대규모 선단으로 고려의 군산방면으로 침입(1380년 8월, 우왕6)하자, 고려는 세계 최초의 포함을 동원해 진포에 침입한 왜적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한다.
②왜구는 약탈한 곡식을 배에 싣고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 묶어두고, 일부 병력만 남겨둔 채, 상륙해 고려의 지방을 휩쓸며 약탈을 일사는 중이었다.
③고려는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으로 화포와 화약무기를 장착한 병선 100척으로 진포에 정박중이던 왜구의 함선을 격파했다.
화포에 힘입은 고려는 왜구의 배 500척을 모조리 파괴하고 왜구에게 붙잡혔던 고려 백성(330명)을 구출한다.
④간신히 살아남은 왜구들은 옥주[충북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지만, 배가 모두 격파당해 퇴로가 끊기자 이산[옥천군 이원면], 영동, 황간, 상주 등지로 도망다니면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⑤기록에 따르면 왜구들은 상주에서 어린아이를 잡아 배를 갈라 (내장의 모양으로)점을 친 후 다시 선주[경북 선산], 경산, 함양, 남원 등지로 도주했다.
⑥한달 후 고려는 이성계를 양광도ㆍ전라도ㆍ경상도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1380년 9월, 우왕6)하고 왜구 잔당의 토벌에 나서니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이 황산대첩으로 함경도 출신의 변방인 취급을 받던 이성계는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면서 훗날 왕조창업의 기틀을 세운다.
⑦이성계는 당시 고려의 중앙귀족들에게 여진족 비슷한 무리 정도의 홀대를 받은 듯 하지만,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아들 방원이 17살 때 고려의 과거에 합격(1382년 나이 15세진사시 합격, 1382년 16세 문과과거 급제)하자 대궐 뜰에 엎드려 절하는 등 감격에 겨워했다. 이는 중앙귀족의 이성계에 대한 은근한 무시, 멸시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방원의 과거급제는 엄청난 자부심을 안겨줬을 것이다.

기사입력: 2019/10/21 [08:01]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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