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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화약, 본격 대량살상 무기의 등장
최무선, 화약무기 개발로 려말선초 왜구 무찔러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9/10/23 [06:47]

[김쌤’s 한국사] = 우리 편은 안전하고, 상대방(적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숙원중의 하나였다. 그 최초의 염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무기가 바로 ‘화약’이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화약 이전과 화약 이후가 확연히 달라진다. 화약은 1차 세계대전을 거쳐, 2차 세계대전에서 비행기와 함께 비약적 발전을 이뤄 인류는 마침내 궁극의 무기인 수소폭탄(핵열융합폭탄)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1) 엉망이었던 고려의 국정 시스템이 화약무기 개발 이끌어
①북로남왜에 시달리던 고려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순전히 개인적인 노력으로 화약의 제조법을 익히고 화약무기까지 발명하기에 이른다. 필요하면 중국에서 수입하면 되고, 활용도라고 해봐야 폭죽놀이 정도에 그치던 화약을 최무선은 무기로 전환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의 결과가 화통도감(火筒都監, 1377년 10월, 우왕3) 설치로 나타났다.
②도감은 임시 또는 특수기관이라는 의미지만, 관청을 설립했다는 것은 최무선이 화약의 제조법과 그 활용도까지 완벽하게 익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의 효용성을 국가에서 인정했다는 의미도 있다.
③최무선의 화약무기는 진포전투(1380년 8월, 우왕6)에서 왜선 500여척을 격침하는 성과를 내면서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다.

 

▲ 화약의 발명은 전쟁의 역사에서 대규모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의 발달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내는 계기가 됐다.     © 경기도민뉴스



④사실 고려입장에서 화약의 제조법을 알아내는 것은 국가의 명운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고려말 합단적과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가뜩이나 국가 시스템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왜구의 지속적인 대규모 침략은 그야말로 고려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넣는 상황이었다.
⑤왜구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왜구가 고려의 영토에 침입하기 전 바다의 주요길목에서 방어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고려의 지도부도 알고 있었다. 최영 장군(1316년 충숙왕3~1388년 우왕14)은 경상도부터 충청도까지의 해안선을 방어할 수군을 육성하기 위해 2000척의 병선을 건조하고, 2만명 수준의 수군을 징발하려 했으나 당시 엉망인 고려의 국가재정과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⑥이런 엉망인 국가재정과 비정상적인 국가시스템이 역설적으로 최무선이 화약의 제조법을 알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화약무기를 만들어 운용할 필연적인 동기를 제공했고, 결국에는 왜구와의 전투에서 우세를 확립하기 시작한다.

 

2) 왜구의 등쌀을 한방에 잠재운 신무기 화약
①고려시대에는 ‘(선병)도부서’라는 바다를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군사행정조직인 동계에는 여진족의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2개가 있었고, 북계는 강과 나루터에 설치해 보병과의 합동작전을 맡았다.
②전라, 경상지역의 해안선을 방비하기 위한 동남해도부서도 있었지만, 무신정권기와 원(몽골)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의 수군조직은 사실상 와해된다. 수군조직이 와해되자 충정왕(1338년~1352년, 재위 1348년~1351년)때 왜구가 130척으로 강화도와 한강 하류를 점거하고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공격할 때, 이를 막아선 고려군의 병선은 100여척에 불과했고 참패했다.
③왜구의 등쌀에 못이긴 고려는 병선을 건조해 왜구를 방비하려 했다. 그런데 정보가 새어나간 탓인지, 400척의 왜구가 몰려와 각산(경남 고성)이라는 곳에 정박해있는 고려의 함선 300척을 화공(1358년 3월)으로 없애는 바람에 고려는 막다른 골목길에 몰린 형국이 된다. 배도 없고, 수군(보병에 비해 훈련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도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지도부에서는 바다에서 왜구를 막기 힘드니까 육지에서 막아내자는 ‘육방론’같은 이상한 전술도 나오기 시작한다.
④바다에서 날뛰는 왜구를 바다에서 막지 못하는 한, 육방론은 허구일 수밖에 없는 전술이자 전략이었다. 수군을 조련할 시간도, 재정도 취약했던 고려입장에서는 한방에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라도 화약무기는 반드시 필요했다.

 

3) 무거운 화포를 배에 실어 기동력, 전술 우위 확보해
①천신만고 끝에 최무선이 화약의 제조법을 알아내고, 화약에 걸맞은 무기를 개발(화포)하면서, 고려는 화약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병선을 건조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화약무기인 화포는 무쇠덩어리로 포신을 만들었기에 육지에서는 화포를 움직일 방도가 없어서 활용도가 낮았다.
②이는 세계 1차~2차대전을 거치며, 나치독일에서 강력한 화력을 가진 거대한 대포를 만들었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대포를 고정시키고 옮길 수 있는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결국 대포를 전선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열차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기동성에서 뒤져 실제 전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못했었다.
③어찌됐든 고려에서는 다행이도 튼튼한 함선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었다. 강력한 화포의 반동력을 견뎌낼 함선을 만들고, 여기에 화포를 탑재하자 고려는 오랫동안 열세에 놓였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드디어 승기를 잡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 전투가 바로 진포해전[진포대첩]이다. 파괴력은 좋지만 무게 때문에 애물단지였던 화포를 병선에 거치하자, 기동성 확보라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④중세 해전은 대체로 △뱃머리(船首)에 뾰족한 충각(衝角)을 달고 적선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전술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처럼 적선에 뛰어들어 백병전으로 상대방을 물리치고 적선을 점령하는 전술 △적선에 접근해 불화살이나 불뭉치를 쏘아서 적선을 불태우는 방법 등을 사용했다.
⑤상대방의 배에 실린 물건을 약탈하고, 포로를 잡아서 노예로 팔아버려야 목숨을 건 해적행위의 이득이 발생하는 왜구는 속도가 빠른 세키부네(관선?船)의 특성을 살려 적선으로 뛰어들어 상대방을 제압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⑥반면, 왜구를 격퇴하고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고려의 수군은 충각전술이나, 화공작전을 사용했다. 충각전술은 상대방의 배가 너무 빨라 따라잡기 힘들고, 화공작전은 바다 위에서라는 공간의 제약 때문에 쉽지만은 않았다. 적을 완벽하게 섬멸하기 위해서는 화공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단순하게 불을 지르는 것으로는 부족한 상황에서 최무선의 화약의 개발과 화포의 발명은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에게는 궤멸적 타격을 주기 위한 최선의 방법, 즉 신의 한수가 된다.
⑦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23차례의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사용한 전술이 바로 진포해전의 전술을 더욱 고급화한 것이다. 다만 마지막 노량해전은 조선-중국의 연합군과 왜군의 전 병력이 맞붙은 전투였고 이순신 장군은 우방인 명의 수군도 보호하려다보니 그만 유탄에 희생당한 면이 있다.

기사입력: 2019/10/23 [06:47]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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