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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어우동, 조선 최대 섹스스캔들
후대 들어 유교적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 재평가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08/21 [05:18]

[김쌤’s 한국사] = 조선 최대 섹스스캔들의 주인공은 단연 어우동(於宇同, 1440?~1480.10.18)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 박윤창은 음보(정식 과거시험이 아닌 선조의 공적으로 출사하는 것)로 관직에 올라, 승문원지사에 이르렀다.


박어우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데, 어우동이라고만 하는 것은 섹스스캔들의 여파로 성씨를 빼고 이름만 불렀기 때문이다. 어을우동이라고도 하는데, ‘얼동’이라는 아명 또는 별칭이었던 듯하다. 어우동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성종조, 용재총화(성현) 등이 있으며 몇몇 신뢰하기 힘든 구전(성종이 몰래 찾았다는 설이 대표적이다)도 있다.

 

▲ 방기환의 소설을 원작으로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의 영화 ‘어우동(1985년 9월28일)’의 포스터. 이보희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 수상.     © 경기도민뉴스


 

 

◇ 왕실종친, 관리 등 최소 10명 이상과 사통
성종실록(122권, 성종11년 10월18일, 1480년)에 따르면 어우동은 △구전 △홍찬 △이승언 △감의향 △오종련 △박강창 △이근지 △지거비(노비였다)와 간통했다고 한다. 또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도 혐의를 받았다.


어우동 자신이 왕실이었던 태강수(守라는 직위는 왕실 친족에 부여하는 일종의 명예직) 이동과 결혼했었지만, 왕실쪽 사람들과도 스캔들이 있었다.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가 바로 그들이다. 어우동은 세명의 왕실 남자와 관계를 맺은 셈이다.


어우동이 만난 여러명의 남자 중 어우동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이는 박강창과 감의향이었던 듯하다. 어우동은 자신과 관계한 남자들의 몸에 어우동이라는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도록 했는데, 자신도 남자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겼다. 어우동은 등에 감의향의 이름을 문신하고, 팔뚝에는 박강창의 이름을 문신했다.


반면, 어우동에 빠져 자신의 몸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긴 남자도 있었는데 방산수 이난이 대표적이다. 2020년 현재도 자신의 연인의 사진을 팔뚝 등에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비슷하리라.

 

 

◇ 어우동, 남편의 변절에 홧김 서방질?
어우동과 결혼한 태강수 이동은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세종의 둘째형)의 다섯째 아들 영천군의 서자다. 어우동은 아들을 낳지 못해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댁의 무시와 냉대를 받다가 버려졌다고 한다.

 

어우동이 쫓겨난 이유는 △은장이와 간통을 해서 이동이 쫓아냈다는 설과 △연경비라는 기생(또는 첩)을 사랑한 이동이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았다는 설이 있다.


성종실록(71권, 성종7년 9월5일, 1476년)은 “태강수 이동이 연경비(燕輕飛)를 사랑해, 아내 박씨(어우동)를 버렸습니다. 종친이 첩을 사랑해,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리는 것을 허용하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려우니 재결합하게 하소서”라고 종부시가 권고하니, 권고를 따르고 태강수를 삭탈관직 처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대로라면 어우동의 간통은 이혼을 원하는 남편 태강수의 무고였던 셈이다. 태강수는 어우동과의 재결합을 거부했고, 어우동은 법적으로는 태강수의 부인이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됐다.

 

 

◇ 어우동사건 수사중 지배계층의 허위의식 드러나
쫓겨난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친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도성의 길가에 집을 짓고 계집종과 함께 살면서 본격적으로 남성행각에 나선다. 그 시기는 태강수에게 쫓겨난(1476년 9월) 이후이므로 성종7년~성종11년이었다.


4년여동안 도성안의 왕실종친, 관리, 과거급제자 등 10여명 이상의 남자들과 연애를 하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급기야 한성부에 어우동의 연애 스캔들이 퍼져나가면서 김종직, 사림파 출신 사간원, 사헌부의 언관, 훈구파도 가세해 어우동의 죄과를 공격(119권, 성종11년 7월9일)한다.


어우동과 관련된 인물들도 줄줄이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때 어우동을 위해 끝까지 변호한 인물이 방산수 이난이었다. 방산수 이난은 유감동(세종10년, 1428년에 발생한 섹스 스캔들)의 전례를 들려주며 어우동에게 관계한 모든 인물을 실토하라고 권유한다.


방산수 이난은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살았는데, 은밀히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옥가락지를 신표로 줬습니다. 김휘는 어을우동을 사직동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를 빌려 정을 통했습니다”라고 어우동과 어울린 남자들을 밝히기까지 한다.


어유소는 여진정벌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1461), 가선대부겸 회령부사(1463), 이시애의 반란 평정(1467), 숭정대부겸 이조판서겸 오위도총관(1480.8) 등에 이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어우동에 혹해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사통을 했다고 왕실종친 방산수가 옥가락지라는 물증까지 들이대며 진술하자 조정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 어우동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영화 ‘어우동 주인없는 꽃(2015년 1월29일)’의 포스터. 이수성 감독, 강은비(어우동역)가 주연을 맡았다.     © 경기도민뉴스


 

 

◇ 영화 등 대중매체의 소재로 인기 
어우동의 죄과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것으로 결국 군기감 앞에서 교형(성종11. 10.18, 1480) 당한다. 당시 조정은 어우동에게 사형과 유배형으로 주장이 나뉘었지만, 성종은 사형을 선택한다.


어우동이 앞서 밝힌 유감동이나 이구지, 대방부부인 송씨 등과 다른 점은 ⅰ)남편의 버림을 받은 이후에야 남성행각에 나선점, ⅱ)어우동의 상대남성이 당시 엘리트급이었다는 점, ⅲ)어우동 자신이 시서화에 능했다는 점 등이다.


이런 점이 묘하게 오버랩되면서 어우동은 조선사회가 유교적 가부장적질서를 잡아가던 시대의 희생물로 비쳐져, 현대에 와서는 영화와 연극 등으로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어우동은 예술적 재능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삼강오륜을 해친 음녀라는 인식 탓에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대동시선(大東詩選)>에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가 전해진다.


<扶餘懷古(부여회고)>
白馬臺空經幾歲(백마대공경기세) 백마대 텅빈 지 몇 해가 지났는가
落花巖立過多時(낙화암입과다시)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靑山若不曾緘黙(청산약불증멸묵)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는다면
千古興亡問可知(천고흥망문가지)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 다음은 성종실록 어우동 처벌 관련 기사 목록
△실록119권(성종11년 7월9일)=의금부에서 어을우동과 간통한 방산수 이난 등을 죄줄 것을 아뢰다.
△실록119권(성종11년 7월11일)=의금부에서 간통한 어을우동, 박강창, 홍찬, 어유소, 노공필 등을 국문하도록 청하다.
△실록120권(성종11년 8월4일)=장령 김윤종이 어을우동과 간통한 어유소, 김칭을 국문하도록 아뢰다.
△실록120권(성종11년 8월5일)=대사헌 정괄 등이 어을우동과 간통한 어유소, 노공필 등을 국문하라는 차자를 올리다
△실록121권(성종11년 9월2일)=간통한 어을우동과 구전, 홍찬, 이승언, 오종련 등의 죄를 의논하다.
△실록122권(성종11년 10월18일)=어을우동을 교형에 처하고 그의 간통행적을 밝히다.

 

 

 

기사입력: 2020/08/21 [05:18]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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