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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유감동, 조선의 또 다른 섹스스캔들
성폭행 피해자의 시대와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08/25 [07:43]

[김쌤’s 한국사] = 흔히들 어을우동을 조선 최대 섹스스캔들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어을우동이 명확하게 기록상으로 관계한 남자들은 10여명선으로 최대 2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40명과 관계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유감동(兪甘同, ?~?)이다. 기록(세종실록9년 8월17일~9월16일)은 유감동과 관계한 남자들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데 무려 40명이다.

 

▲ 다른 기록물이 대부분 영화 등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독 유감동 스캔들은 규모가 컸지만 작품화 한 것이 드물다. 장면은 채널A의 천일야사 중 유감동을 다룬 한 장면.     © 경기도민뉴스



그 40명은 △권격 △김여달 △김약회 △김유진 △김이정 △남궁계 △박근 △박종지 △박호문 △변상동 △설석 △성달생 △송복리 △안위 △여경 △유강 △유귀수 △유승유 △이구상 △이견수 △이곡 △이돈 △이수동 △이성 △이승 △이치 △이효량 △이효례 △오안로 △장지 △전수생 △전유성 △주진자 △정중수 △정효문 △최문수 △최복해 △최심 △홍치 △황치신(이상 가나다순, 편집자 정리) 등인데 명문가와 개국공신의 후예들이 대부분이다.

 

 

◇ 성폭행 후 쫓겨나자, 성폭행범과 동거
실록은 “유감동이 남편과 같이 살 때, 김여달과 간통했는데, 후에 도망하여 김여달과 살았다”고 한다. 실록을 근거로 살펴볼 때 유감동은 당초 김여달이라는 사람에게 강간을 당한다.


지사간원사 김학지등이 세종에게 상소한 기록을 보면 “김여달은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와 결당해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을 만나자 관리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실록37권, 세종9년 9월29일, 1427년)”한 것으로 나온다.


이 기록을 토대로 보면 김여달은 현대식으로는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인 듯하다. 자경단 비슷한 단체를 이끌며 마을의 치안을 핑계대며 못된 짓을 하고 다녔는데, 하필 유감동이 김여달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유감동은 병을 앓아 비접(避病, 앓는 사람이 거처를 옮겨 요양하는 일)하던 길이었다.


유감동의 이후 행보를 보면, ‘스톡홀름 증후군(범죄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둔하며 의지하려는 성향을 일컫는 심리적 현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에게서 도망쳐 김여달에게 달려간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강간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으로도 충격을 받은 듯하다. 기록이 부실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김여달과 살면서 자신을 창기출신이라고 소개한 것이나, 뭇 남성들의 접근을 모두 수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미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포자기 상태가 된 상태에서 비록 육체적으로나마 남성들과 관계를 맺을 때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았는 지도 모른다.

 

 

◇ 관리들, 유감동에 혹해 국고까지 축내
우의정 정탁(1등 개국공신)은 유감동에게 한눈에 반해 사통했다(세종은 정탁같은 선비가 체통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정탁의 조카 정효문은 유감동과 숙부와의 관계를 알면서도 사통했다.


이효랑은 유감동의 본남편의 매부였지만 사통했다. 이성은 유감동을 첩실로 들였는데, 친구 변상동은 친구의 첩과 사통했다. 권격은 고모부 이효례와 유감동과의 관계를 알면서도 사통했다.


아전인 황치신은 길거리에서 유감동을 보고 단번에 눈이 맞아 길섶에서 정을 통하고, 이후 관아로 끌고 가 여러 차례 사통했다.


해주판관 오안로는 관아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다. 전수생은 최복해를 꼬드겨 공문서를 위조(맹인, 서생)해 군자감에서 쌀 10두에 이어, 쌀 1곡(斛)을 빼돌려 유감동에게 줬다.


세종실록(37권, 세종9년 9월16일, 1427년)은 “이승과 이돈은 근각(根脚)을 알면서도 간통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뻔뻔스러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까지 개탄한다.


유감동의 많은 남성편력 중 정탁과 이효랑의 사건은 강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라해서 크게 문제가 됐었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관료들이 유감동에게 맥을 못춘 것은 한눈에 남자를 사로잡는 미모나 매력이 있었던 듯하다. 이름이 감동인 것으로 미뤄 얼굴이나 피부가 검은 건강형 미인이었던 듯하다.

 

▲ 당대의 선비 정탁(고려말~조선초), 세종의 사돈이 되는 권격 등이 모두 유감동에 혹했다.     © 경기도민뉴스


 

◇ 사건 한달만에 유감동을 관비로 유배
김여달과 생활하면서 유감동은 스스로를 창기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훗날 사건이 터지자, 의금부와 사헌부 등에서는 유감동이 양반의 부인인 것을 알고 사통했느냐, 아니면 창기인 것으로 알고 사통했느냐로 처벌의 강도를 달리했다.


양반의 부인인 것을 알고 행한 간통은 곤장 80대, 창기와의 간통은 곤장 60대로 정해졌다.


유감동과 관계한 남자들에 대한 처벌은 자자, 곤장, 유배 등이었고 당초 교형에 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조정관료들도 있었지만 유감동에 대한 처벌은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것으로 정했다. 세종은(10년 윤달 4월1일, 1428년) 유감동의 천역을 면제하고 먼 지방에 안치(安置)했다. 물론 조정에서는 사면이 불가하다는 반대도 있었다.


그 이후의 생애는 기록에 없다. 시서화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지만, 음부(淫婦)의 작품이라 하여 없어져 전해지는 것은 없다.


처벌받았던 남자들을 보면 황치신은 관찰사와 참판, 권격은 국왕 세종과 사돈지간, 정효문은 중추원부사에 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유력가문의 자제를 엄격하게 벌주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기사입력: 2020/08/25 [07:43]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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