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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상수리 제도, 지방세력 통제 도구
통일신라=상수리ㆍ외사정, 고려=사심관ㆍ기인, 조선=유향소ㆍ경재소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09/29 [07:33]

[김쌤’s 한국사] = 지방세력의 통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왕조시대의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고려는 공신에게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사심관제와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상경시키는 기인제도를 사용했다. 이중 ‘기인’은 통일신라의 상수리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조선의 유향소 역시 고려의 사심관ㆍ기인을 시대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전적(시도유형문화재 제401호, 2007년 7월30일 지정). 조선시대 유향소(留鄕所) 관련 문건과 경산 자인현 유향소 분설 등을 기록했다.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1) 통일신라의 상수리와 외사정
통일신라는 지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외사정’이라는 중앙의 관리를 지방에 파견해 지방관리의 비위를 감찰했다. 또 지방호족이나 호족의 자제를 왕경(경주)으로 일정기간 올려 보내도록 하는 상수리제도를 운영했다.


①인질의 성격에서 유래한 상수리
상수리 제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내물마립간~법흥ㆍ진흥왕대에 수차례 고구려와 왜에 볼모(인질, 박제상 고사가 유력)를 보냈다는 고사를 들어 국가 간의 볼모제도를 모방해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용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삼국유사>에는 무진주(광주광역시)의 지방호족인 안길이 상수(上守 서울에 올라가 특정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이 있다. 이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로, 상수리 제도는 지방세력을 효과적으로 감시ㆍ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2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는 왕의 서제(庶弟)인 차득공(車得公)과 무진주의 주리(州吏) 안길(安吉)과의 고사를 전하며 “나라 제도에 매양 외주(外州)의 이(吏) 1명을 경중제조에 상수하게 하였다. 주(註)에 지금의 기인(其人)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호족 본인이나 호족의 자제를 일정기간 중앙 정부에 머무르게 해 지방을 통제했고, 지역의 사정에 대해서 자문하는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②지방에 파견한 중앙관리, 외사정
지방관의 비행을 감찰하기 위해서 외사정(673/문무왕 13)을 두었다. 주(州)에 각 2명(합 18명), 군(郡)에 각 1명(합 115명)으로 하여 그 정원은 모두 133명이었다. 외사정은 지방에서 근무했지만, 중앙 감찰기구인 사정부(司正府)의 지시를 받던 관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사심관과 기인

(1) 사심관
①호족과 공신을 사심관으로 임명
후삼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압박에 시달리던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경순왕)는 나라를 통째로 들어 고려에 항복(935, 태조18)한다. 기뻐한 고려태조 왕건은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동시에 여러 공신을 각각 자신의 출신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향직(鄕職)을 다스리게 했다.


지방 호족의 연합세력인 고려(918~1392)는 체제를 정비하면서 건국과 통일전쟁의 공신(功臣)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제하며, 중앙집권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족이자, 중앙귀족들은 여전히 자신의 고향에 전통적인 세력 기반과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고려태조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던 당시 상황에서 사심관을 기인(其人)과 함께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②중앙관리가 지역 사심관 겸임
태조 때 설치한 사심관은 983년(성종 2) 지방관제를 실시하고, 체제를 정비함에 따라 변화한다. 996년(성종14)에는 사심관의 정원을 규정해 500정(丁) 이상의 주는 4명, 300정 이상의 주는 3명, 그 이하의 주는 2명으로 정원을 책정했다. 사심관은 최소 2명을 임명, 권력의 집중을 막았다.


이때 고려의 군현은 600개였으므로, 최소 2명씩을 임명했다고 하면 사심관의 총수는 최소 1200명에 이른다. 결국 성종때 중앙관료 대부분이 사심관을 겸임했다는 것으로, 이는 당초 사심관이 지녔던 호족적인 성격과 지방통제 수단이라는 의미가 감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사심관은 점차 수가 늘어나고, 관료적 성격을 띠면서 관료체계에 편입된다.
관료는 본향(本鄕), 처향(妻鄕), 모향(母鄕), 조모향(祖母鄕), 증조모향(曾祖母鄕)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연고지의 사심관을 겸임할 수 있도록 변질된다.
그러나 사심관은 특수관직이 하나로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관장해 그 관할 지방민의 종주(宗主)가 되고 유품(流品)을 심사하며, 부역을 공평하게 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등의 직능을 맡아 지방통제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③고려 정부, 결국 사심관제도를 없애다
사심관은 관료로 출세할 수 있는 정치ㆍ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유용해, 관료들은 서로 연고지의 사심관을 겸임하려고 경쟁했다.


의종ㆍ명종 이후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자, 사심관의 폐단이 차차 드러났다. 사심관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넓은 공전(公田)을 점유하고 많은 민호(民戶)와 노비들을 가로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등 국익을 좀먹는 존재로 변질됐다.


1283년(충렬왕9) 사심관을 폐지했으나, 권문세족들이 스스로 사심관이 돼 폐단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 결국 1318년(충숙왕5) 사심관을 완전히 폐지하자, 백성이 매우 기뻐했다는 기록은 사심관이 백성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준 존재였는지를 알도록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충숙왕 6년(1319)에 사심관이 차지한 토지와 민호를 몰수했는데 민(民) 2360호, 노비 137명, 공전 1만9798결, 사전 1227결, 위전 315결이었다.


고려말기들어 다시 권문세족들이 사심관을 설치해, 중앙집권체제를 흔들고 지방민을 수탈했다. 공민왕 때 신돈이 자신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고 하자 공민왕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신돈의 사심관 직위 차지 사건은 훗날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하는 한 계기가 된다.


이 사심관은 조선시대에는 경재소와 유향소(성종실록 15년 5월 계사조)로 이어진다.

 

(2) 기인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들의 독자적인 기반을 효과적으로 억누르기 위해, 사심관 제도와 함께 기인제도를 마련했다.
기인제도는 성종~문종을 거치며 제도가 정비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자, 많은 호족을 향리로 격하시켰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호족들을 향리로 격하시키고, 그 자제들을 일종의 인질로 삼아 수도(개경)에 머무르게 했다.


기인은 대체적으로 10년~15년 동안 중앙 관아에서 이속으로 잡무에 종사하며, 자신의 출신 고향에서 과거를 보러 오는 자에 대한 신원조사 등을 담당했다. 또 사심관 임명과 차출에는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고려 초기 지방호족이 중앙귀족화하는 과정에서 탈락한 군소 호족들이 향리로 격하됐기 때문에 기인의 신분적 지위는 높지 않았고, 몽골의 침입 때에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때로는 노예보다 심한 고통으로 기인들의 도망이 끊이지 않자, 고려 정부는 1336년(충숙왕5)에 기인 제도를 없애버렸다.

 


3) 유향소
(1) 유향소, 퇴임 장관이 현직 군수 견제?
조선 초기에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 은퇴자)들이 조직한 자치기구로 향사당(鄕射堂), 풍헌당(風憲堂), 집헌당(執憲堂), 유향청(留鄕廳), 향소청(鄕所廳), 향당(鄕堂)이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조선 건국 초기 중앙관계에 진출했던 관리들이 중앙에 머무를 필요성이 없어졌을 때 향촌으로 돌아와서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이 중심이 된 기구를 만든 것이 유향소다.


유향소에 참여하는 유향품관(留鄕品官, 향촌에 머무는 은퇴 관리)들은 품계상으로 수령보다 높은 경우가 많고, 중앙의 고위관직과도 연결돼 있어 수령이 큰 힘을 펴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태종은 1406년(태종6)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향소를 혁파하고, 각 고을의 유향품관 중 1명을 신명색(申明色)으로 임명해, 지방 사정에 익숙하지 못한 수령을 돕게 했다.
신명색도 지방 수령을 능멸하고, 민폐가 심해지자 1417년(태종17) 없애버렸다.

 

(2) 견제와 야합으로 폐쇄와 부활을 거듭하다
견제수단인 유향소가 없어지자 지방수령의 불법행위와 향리들의 폐단(일명 아전이라고도 하는 향리는 봉급이 없었던 탓에 지역백성을 착취하는 일이 많았다)이 향촌사회의 문제로 떠올랐다.
유향소를 부활시키기 위해 조선정부는 수령에 대한 고소 금지, <유향소작폐금방절목留鄕所作弊禁防節目>을 반포한다. 세종은 유향소를 부활(1428년, 세종10) 시키며 <유향소부설마련절목留鄕所復設磨鍊節目>을 만들어 각 경재소(京在所)가 유향품관 중 적임자를 선정해 유향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부활한 유향소는 탐관오리와 간사한 백성만 규찰하도록 했다.


조선정부는 1435년 경재소 제도를 정비, 현직 관원이 아버지의 내외향(內外鄕), 어머니의 내외향, 처의 내외향, 할아버지의 외향, 증조부의 외향 등 8향의 유향소를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현직관리가 퇴직자 위주인 유향품관을 통제할수 있도록 한 것으로, 유향품관은 관권과 타협한다.


유향소와 수령 간의 견제와 갈등이 말썽이 돼 유향소의 권한을 축소하자, 이번에는 유향소와 수령이 한편이 돼 백성을 합법적으로 수탈하는 수단이 돼버린다. 세조는 유향소를 다시 폐지하기에 이르고, 그나마 지방수령의 견제수단이던 유향소가 없어지자 탐관오리의 농간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게된다.


성종은 1488년(성종19) 유향소를 다시 부활하면서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주관하도록 했다. 또 향촌의 불효, 부제, 불목 등 향촌 교화에 중점을 두도록 했다.

 

(3) 지방에서 권력기관으로 변모, 백성을 괴롭히다
중앙 정계로 진출한 사림은 성리학적 향촌질서 확립과 세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유향소와 경재소를 밀접하게 관련시켜 놓았다. 사림파의 시도는 영남 몇개 지역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훈구파(勳舊派) 재상들이 경재소를 통해 대부분의 유향소를 장악했다.


그러자 사림의 생원ㆍ진사들은 따로 사마소(司馬所)를 설치하는 등 유향소를 두고 양반사회 안에서도 반목이 일어났다. 유향소를 두고, 양반계층 안에서 반목이 끊이지 않자, 아예 없애자는 의견이 대두(이미 여러번 없앴다가 부활시켰다)되자, 유향소의 성격이 서서히 변화하고, 명칭도 향청(鄕廳)으로 바꿨다.


작은 현의 유향소는 좌수(1명)와 별감(2명)으로 구성했다. 이 유향소의 좌수나 별감이 되기 위해서는 향안이라는 일종의 족보 비슷한 것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야 가능했다.


조선 초기부터 지방에는 각 지역마다 지역사회의 지배층인 현족(顯族)이 구성원인 계(契)가 있었다. 그 구성원을 향원(鄕員)이라 했고, 향원의 명부를 향안이라 했다. 그런데 이 향안에 오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향원들은 자신들만의 계(契)를 운영하며, 계원 중에 적당한 사람을 좌수ㆍ별감 등 유향소(향청)의 임원으로 선출했다. 전직 관리출신들의 모임일 수밖에 없는 유향소(향청)는 결국 지방수령의 교체, 아전과 향리의 결손 등에는 자신들이 그 소임을 대리하기도 하면서 권력기관으로 변모한다.


유향소(향청)는 문서수발, 수세(收稅), 부역의 부과, 권농 등 대민 행정실무를 주관하고, 산송(山訟 조선 후기들어 풍수지리를 크게 신봉하면서 묘지다툼이 빈발했다)이나 군역ㆍ부역 등의 송사를 유향소(향청)가 맡아 처리하면서 뇌물수수 등 부정에 연루돼 향촌주민의 민원이 많았다.

 

 

4) 경재소
유향소를 통한 유향품관들의 작폐가 심해지자,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해 거경품관으로 서울에 경재소를 설치한 것이 <태종실록>에 보인다. 세종은 1435년(세종)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해 경재소를 대폭 정비하고 제도화했다.


경재소는 정부의 고관이 자신의 출신 지역 경재소를 관장하도록 했다. 따라서 경재소는 지역의 유향소 품관을 임명, 감독하고, 출신 지역과 정부와의 중간에서 여러 가지 일을 주선했다.
대체적으로 고려시대 사심관과 비슷한 기구로, 작폐 또한 사심관과 마찬가지였다.


세조 때 우의정 홍윤성(수양대군을 도와 단종을 제거하고 세조로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은 홍산현(鴻山縣)의 경재소를 맡자 현감을 멋대로 천거하고 임명하는 등 홍산을 자신의 왕국처럼 만들기도 했다.


중앙 관계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훈신(勳臣) 척신(戚臣)들은 연고지의 경재소를 관장하며, 자신의 경제기반을 확대하고, 지방 관리와 개별적 연결을 통해 유향소를 장악하자, 사림들이 저항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경재소는 임진왜란 후 수령권이 강화되고, 유향소의 지위가 격하되자,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1603년(선조36) 없앴다.

기사입력: 2020/09/29 [07:33]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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