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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왕비였던 친자매 천추-헌정의 스캔들
언니 천추태후 역모 휘말리고, 동생 아들은 왕위 즉위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10/06 [07:04]

[김쌤’s 한국사] = 건국(918)후 후삼국을 통일(936)한 고려에게 닥친 외부의 위협은 거란(요)의 침입이었다. 1차침입(993년, 고려 성종12)은 서희가 담판(談判)으로 물리쳤지만, 뒤이은 2차침입(1010년, 고려 현종1)은 개경을 함락할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 천추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 왼쪽부터 천추태후, 김치양, 강조, 강감찬, 왕욱.     © 경기도민뉴스


당시 거란은 2차침입의 핑계로 ‘목종을 폐위한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목종을 폐위한 주인공이 바로 강조였다. 강조는 거란 2차침입 방어의 총책임을 맡았지만, 패전으로 전사한다. 이 때문에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피난길에서 왕비를 잃는 등 고난을 겪는다.

 

◇ 언니 천추-외척과, 동생 헌정-숙부와 사통
거란 2차침입의 핑계였던 강조의 목종폐위사건을 파악하려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공식존호 헌애왕태후 獻哀王太后)를 알아야 한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로 아버지는 왕건의 여러 아들 중 한명인 대종(추존)이다. 왕건 사후, 고려의 왕위는 혜종(943~945) 정종(945~949) 광종(949~975)으로 이어지는데, 이 세명의 왕은 모두 왕건의 자식이었다.

 

▲ 태조 왕건을 포함한 고려 전기 국왕의 계보. 순혈보호를 위해 근친혼이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광종의 장자가 경종(975~981)이고, 경종은 어린아들(2살)을 제치고 사촌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성종(981~997)이다. 경종의 왕비 천추태후와 헌정왕후는 사촌 성종의 친동생으로 자매지간이었다. 자매중 언니 천추태후는 사통으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정부 김치양의 역모에 휘말리고, 동생 헌정도 사통으로 자식을 낳지만 현종으로 옹립받는다.
족보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경종이나 성종이나 따지고 보면 모두 태조 왕건의 손자다. 성종은 아들이 없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사촌형 경종의 아들 목종(980~1009, 재위997~1009)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경종은 자신의 사촌누이인 친자매 헌애왕후, 헌정왕후를 왕비로 들였는데 ‘왕씨’성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되므로 당시 왕족 중 여자형제들은 외가집의 성씨를 따르게 했으므로 헌애(천추)ㆍ헌정 자매의 성씨는 황보(皇甫)씨라 했다.

 

◇ 김치양, 천추사이의 소생을 왕으로 만들려
경종이 죽자, 성종이 즉위하고, 천추ㆍ헌정 자매는 각자 자신의 연인과 사통했다. 천추태후는 외척 김치양(?~1009 현종1)과 사통해 아들을 낳았고, 헌정은 숙부 왕욱(훗날 안종으로 추존)과 사통해 역시 아들을 낳았다.
성종도 죽자, 경종과 천추태후 사이의 소생인 목종이 왕위를 잇고, 갑자기 천추태후의 권위가 강해진다.
문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의 사생아였다. 김치양은 목종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려는 야심을 보인다.
이것이 바로 김치양 반란사건이었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위계승 유력자 대량원군(왕순, 현종)을 숭경사에 강제로 출가(1003년 목종6)시킨다.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보낸후,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해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 중 하나를 보면, 독사과로 백설공주를 살해하려한 것과 유사한 사례도 있다.

 

▲ 천추태후의 원찰로 알려진 진관사와 고려 현종이 즉위 전 박해를 받아 유폐됐던 신혈사 고지의 위치도. 진관사 발굴조사 보고서(2012).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김치양은 천추궁 곁의 대부유고(大府油庫)에 불을 지르고, 혼란을 틈타 목종을 체거(1009, 목종12)하려 했으나, 함께 모반을 권유한 유충정이 밀고해 역모가 드러났다.
목종은 병도 깊은데다, 어머니 천추태후의 등쌀에 권력에 싫증을 느꼈는지, 신혈사에 반강제 유폐중이던 대량원군 왕순을 맞아오게 하고,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 ?~1010)에게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올 것을 명령한다.
궁궐로 들어온 강조는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현종)하고, 역모를 꾀한 김치양과 자식은 제거하고, 김치양 일당과 천추태후를 섬으로 유배해 버렸다.
강조는 유배를 보냈던 목종도 적성현(경기 연천)에서 살해해버리고 군사실권을 잡는다. 이것이 거란이 핑계로 삼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것이다.


◇ 남편의 숙부와 낳은 자식이 고려 현종
천추의 동생 헌정이 만난 왕욱(王郁 안종 ?~996)은 아버지는 왕건이고, 어머니는 제5비 신성왕후다. 신성왕후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사촌누이로, 신라가 고려에 항복(935년 11월)할 때 왕건에게 시집보낸 여성이다.
<고려사>는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며 “백부 지대야군사 잡간 김억렴에게 딸이 있어 덕과 용모가 쌍미한지라 이가 아니면 내정을 구비할 수 없을 것”이라며 신성왕후를 적극 추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당한 미인이었으리라.
경종이 사망(981년)하자, 왕비였던 헌정은 궁에서 나와 살았는데, 아무래도 왕족끼리 모여 살던 곳이었을테고, 그중에서도 왕욱의 외모는 훤칠하지 않았나 싶다.
혈연으로 따지면 모두 사촌 비슷한 사이이고 보니, 흉허물없이 드나들다 연분이 났고, 왕욱의 노비가 왕욱의 집에 일부러 불을 질러버렸다. 숙부 왕욱을 찾은 성종(헌정의 친오빠)에게 왕욱과 헌정의 일이 알려지고, 왕욱은 선왕의 태후와 사통한 죄로 경상도 사수현으로 귀양갔다. 헌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왕순을 낳고 산고로 사망했다.
여기서 족보가 이상하게 꼬이는데, 헌정과 왕순은 태조왕건의 손녀-손자이면서, 모자지간이자 사촌남매라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상하게 꼬인 족보는 경종 성종 현종을 모두 형제지간으로 만들고, 경종의 아들 목종은 오히려 현종보다 항렬이 낮아지게 된다. 결국 강조의 ‘목종폐위-현종옹립’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왕족의 혈연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이 이어지다보니,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 성리학적 기준으로 혹평(?)당한 천추태후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에서 천추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정도전은 “천추태후가 음란해 김치양과 간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했고, “황보씨가 김치양과 간통하고서~중략~어찌 태후의 호를 가질 것인가?” <안정복 동사강목>라고 평가했다.
조선에서의 천추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고려전기는 남녀차별이 거의 없었고, 과부의 개가에 대해서도 별다른 제한이 없었다. 그렇지만 당대에도 천추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던 듯하다.
친오빠 성종이 즉위하자 천추전에 살았기 때문에 흔히 ‘천추태후’라고 하는데, 외척 김치양이 자주 출입하저, 참다못한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보낼 정도였다.
김치양을 못내 버리지 못한 천추는 오빠 성종이 죽고,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다시 김치양을 불러들여 결국은 사통과 역모라는 이중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동생 헌정은 비록 사통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이 왕건의 친자식이고, 본인은 현종을 출산 중 산고로 사망한 것이 오히려 동정심을 불러 일으킨 듯 하다. 더욱이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없던 탓에 현종은 일찌감치 왕위권자로 주변의 기대를 모은다.
천추는 강조의 정변 이후 자신의 고향 황주로 유배당했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에서 사망한다. 드라마 등에서 천추태후를 국난극복의 여걸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도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도 너무 미화했다는 혹평도 있다.
고려초기까지는 왕족의 순혈주의를 지키기 위해 사촌간의 근친혼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아무리 사촌이라도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은 께름칙했던지, 성종은 왕씨, 친동생인 천추와 헌정은 황보씨라고 눈가림을 하기는 한다.

 

기사입력: 2020/10/06 [07:0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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