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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고려종정군, 반원 개혁의 불씨
몽골의 원, 각지의 반란진압 위해 고려에 지원 요청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1/04/22 [20:24]

[김쌤’s 한국사] =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의 요청으로 반군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에 군대를 파견(1354~1356)한다. 이 군대는 고려 최고의 무장 최영 등 40여명의 장군을 포함 2000병력 규모다. 즉위 초반이던 공민왕(재위 1351~1374)은 원나라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종정군(從征軍 말 그대로 원에 배속된 정벌군이라는 이상한 명칭이다)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 제주도의 최영장군 사당(崔瑩將軍祠堂,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1호, 1981년 8월26일 등록).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1) 원의 가혹한 수탈, 농민(홍건적) 봉기
​①몽골의 원나라 최후의 황제 혜종(1333~1367, 명에서는 순제라고 호칭)대는 원 제국의 말기증상이 나타난다. 황족내부의 정권다툼으로 제국은 쇠약해지고, 극심한 차별을 받던 옛 남송(중국 남부지역)사람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미 이전에 유럽의 흑사병이 원으로 침투, 사회혼란을 부추겼다는 설도 있다.
②하남 지방은 원의 착취, 대홍수 복구를 위한 농민의 강제동원으로 민심이 이반한 상태였다. 이틈을 타 백련교(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미래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신봉)의 교주 한산동과 유복통이 민심을 규합해 봉기(1351)한다. 이 세력이 토벌당하자, 살 곳을 마련해달라며 고려를 침범한 것이 홍건적의 침입(1359.12~1361.10)이다.
③이 혼돈의 와중에 나라의 소금을 운반하던 장사성(1321~1367)이 양자강 북쪽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다(1353). 태주, 흥화, 고우(高郵) 등 양자강 북쪽의 주요 진(군사거점)을 점령한 장사성은 이듬해 건국(1354, 국호 大周, 자칭 誠王)한다.
④원은 태사 겸 우승상 타타르(脫脫)가 장사성 진압의 책임을 맡았고, 고려를 압박해 지원군을 받아내 정벌에 나선다. 타타르는 80만병력으로 장사성을 공격(1355, 9월)하지만, 장사성은 수성(守城)으로 일관(1355, 11월)한다. 전투의 와중에 타타르는 모함을 받아 실각하고, 지휘관이 없는 원의 진압군이 퇴각하자, 장사성은 추격해 대패시켰다.
⑤승상의 자리까지 오른 타타르(脫脫)는 원 말기 유능한 승상이었다. 간신을 축출하고, 능력 위주로 국가를 운영했다. 핏줄을 중시하던 몽골사회에서 타타르의 행보는 기득권의 눈밖에 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적들의 탄핵으로 전쟁의 와중에 유배를 당한다.

 

 

▲ 제주도의 최영장군 사당(崔瑩將軍祠堂,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1호, 1981년 8월26일 등록).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2) 고려종정군, 원의 실상(말기의 혼란) 파악
①고려종정군은 원에 있던 고려인을 더해 2만3000규모(추정)로, 원의 선봉군을 맡아 장사성의 본거지 고우(高郵) 공략에 동원된다. 말이 좋아 선봉이지 한마디로 총알받이 역할인데, 선봉을 맡은 고려종정군은 눈부시게 싸워, 고우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간다(1354).
②기록에 따르면 이때 원은 고려인들이 공을 독차지할까봐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일단 물러나고 내일 재차 공성에 나서자고 퇴각명령을 내린다. 밤 사이 장사성군은 무너진 성벽을 수축, 다음날 공격은 실패한다. 이러던 와중에 총지휘관인 탈탈이 참소당해 회안(淮安)으로 유배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③고려종정군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회안로(淮安路)로 이동할 때 장사성의 공격을 방어해낸다. 회안성 전투에서 최영은 두 차례에 걸쳐 적을 격퇴했다. 두번째 싸움은 매우 치열해 최영도 몸에 여러 곳에 창상을 입었지만 사력을 다해 싸워 결국 적을 거의 대부분 섬멸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④고려종정군은 류탁, 염제신,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김용, 이권, 강윤충, 정세운, 황상, 최영, 이방실, 안우, 최원 등이 종군했다. 이들은 모두 고려의 예이스였고, 이중 이방실과 안우는 고려를 침범한 여진족을 섬멸해 고려 삼원수(三元帥 이방실, 김득배, 안우)로 무명(武名)을 날렸다.

 

▲ 제주도의 최영장군 사당(崔瑩將軍祠堂,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1호, 1981년 8월26일 등록).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⑤고려종정군은 남의 나라 전투에 동원된 제한적 규모의 파병이었지만, 당시 종정군은 원나라가 이미 쇠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파악하기에 이르고 이는 훗날 공민왕의 반원 자주개혁의 씨앗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⑥원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인 10만을 징병하려 했다가 취소(1352)하기도 할 정도로 당시 내부사정은 엉망이었다.
⑦극도로 피폐했던 고려는 원의 압력에 못 이겨 종정군을 파견하기 위해 엄청난 출혈을 겪어야했다. 고려는 종정군의 장수들에게 각각 작위를 하사하고, 출전 장병들도 모두 벼슬 진급이라는 당근을 제시했다. 군마(軍馬) 조달은 관원과 승려들에게 강제로 빼앗다시피 했고, 여전히 턱없이 모자라는 군비는 일종의 명예직인 첨설(添設)직을 만들어 매관매작을 국가차원에서 시행할 정도였다.
⑧인터넷에는 지도와 함께 최영 장군의 공적을 부풀려 소개하는 글이 나돌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근거가 없다. 고려종정군에 종군(1354)하기 전까지는 군대를 지휘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이전의 각종 전투기록은 모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새로 발견한 역사서나 금석문 기록이 있다는 학계의 보고도 없다. 그 이후 여진족과의 전투나 왜구 격퇴 등도 거의가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⑨사족이지만 이때 종정군으로 출전했던 염제신은 1354년 프랑크(독일)의 대사를 만나 역사상 한국과 독일 간 최초 접촉 사례를 남겼다.

기사입력: 2021/04/22 [20:2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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