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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 둘리틀 공습(1942년 4월18일)
일본 상공에 나타난 미군폭격기에 전 일본이 경악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9/11/12 [08:18]

[김영수 잡학여행] = 진주만 기습공격은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진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때도 선전포고없이 기습공격하는 작전(?)을 사용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기발한 공격을 감행했다.

 

 

◇ 일본의 미국 공격, 오히려 적개심 불러와
적국에 대한 공격은 적국 국민의 공격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지만, 일본의 미국본토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미국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켜 적개심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전투에서 기선을 잡았지만, 이후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미국과의 전쟁으로 결국은 원폭투하라는 비극을 맞는다. 사진=영화 진주만.     © 경기도민뉴스



일본 해군 잠수함 ‘伊17(길이110m, 수상배수량 2198톤, 어뢰발사관 6문, 140mm대포 1문, 항속거리 2만6000km)’은 1942년 2월24일(미국 현지시각 23일) 19시40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엘우드 정유소에서 14km 떨어진 곳에서 20여분간 140mm포 17발을 발사해 몇 발을 명중시켰다.


일본 잠수함 ‘伊17’은 일본으로 귀환 도중 미국의 유조선 윌리엄H.바크 격침(3월1일), 적 수송선 추정선박을 격침(3월2일)하고 모항 요코스카 귀환(3월30일)한다.


이때 재미를 봤다고 생각했던지 일본군부는 잠수함 ‘伊26’을 이용해 캐나다 밴쿠버섬의 무선기지국 포격(6월20일), 잠수함 ‘伊25’을 이용해 미국 오리곤주의 포토 스티븐스 기지 포격(6월21일) 등도 감행한다.


일본은 종이폭탄이라는 기발한 작전도 수립하는데, 일본의 놀이기구인 풍등에 폭탄을 달아 미국으로 날려 보낸다는 것이었다. 1만개 정도를 만들어 300개정도가 미국에 도착했다고는 하나 효과는 별로였다.

 

 

◇ 일본 폭격 결정, 그러나 기술적 한계
일본의 도발로 미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가는 가운데 미국측은 일본의 콧대를 꺾기 위해 공습작전을 구상한다. 일본이 미국본토를 공격했다고는 하지만, 잠수함으로 바다근처로 와 대포 몇 발을 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미국이 구상하는 공습과는 격이 달랐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구상에 나서지만,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힌다. 먼저, 당시의 항공기술로는 대형일 경우 장거리비행이 가능하지만, 속도가 늦다(상대방의 공격에 속수무책)는 단점이 있었다. 소형일 경우 속도는 비교적 빠르지만, 장거리비행이 불가능하고 공습에 필요한 폭탄을 많이 실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 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자존심을 극도로 자극해 중립에서 참전으로 기울게 했다. 사진=영화 진주만.     © 경기도민뉴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들어서는 말 그대로 비행기를 싣고 다닐 수 있는 배, 즉 항공모함(航空母艦, aircraft carrier)의 필요성이 커졌다. 항공모함에 비행기를 싣고 적의 근처에 최대한 접근해 필요할 때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을 요격한다는 신개념을 막상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이 필요했다. 또 기술적 제약으로 불가능한 것들도 많았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함재기(항공모함의 비행기)는 크기가 작아서 대량의 폭탄을 적재하기 힘들고, 항속거리도 짧은 편이었다. 어찌됐든 미군은 항공모함으로 최대한 일본 가까이 접근해서 주요도시를 폭격한다는 기본 작전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 일본, 최초로 본토를 외적에게 유린당하다
미국 육군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일본을 작전반경에 포함하는 기지(비행장)는 없었다. 소비에트의 비행장은 일소 중립조약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중국은 이륙할만한 비행장이 없었다(착륙할만한 곳은 엉성하나마 있었다).


미군은 결국 항속거리가 길고 대량의 폭탄을 장착하기 위해 육군 폭격기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방안의 작전을 수립하고, 기종은 B-25 미첼 경폭격기로 정했다. 이후 폭격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주요부품을 아예 제거하는 등의 편법을 동원해 미첼 경폭격기 16대를 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일본 도쿄상공에 띄울 수 있었다.


미군의 B-25 미첼 폭격기 16대는 1942년 4월18일 백주대낮에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욧카이치, 와카야마, 오사카 등 일본 각지를 폭격했다. 이 공습으로 일본측은 사망 50명 포함 사상자 363명, 군사시설과 공장 등 350동이 피해를 입었다.


피해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본토는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 없었다는 일본 군부의 선전이 헛구호로 밝혀지는 순간이었으며 진주만기습공격 이후 일본에 당했다는 심정으로 불안해하던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줬다. 일본 군부는 미국의 항공모함 전력을 분쇄하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서둘렀고, 미드웨이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향후 패전의 나락으로 끌려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 진주만 직후 미국은 둘리틀 중령의 지휘아래 일본 본토 공습을 준비한다. 사진=영화 진주만.     © 경기도민뉴스



육군 폭격기의 항공모함에서의 이륙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며, 이 작전은 당연히 모든 사항이 극비였다. 폭격 이후 비행기는 항공모함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지나쳐 중국 동부로 불시착하는 계획을 세웠다.

 

 

◇ 기습 발각 당하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공격
항공모함 호넷,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이 1942년 4월1일 16대의 B-25 미첼을 싣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도중에 항모 엔터프라이즈,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다.


공격 예정 전날인 4월17일, 미군은 일본의 경비정 2척을 레이더로 확인, 교전을 벌인다. 우세한 화력으로 일본의 경비정을 격침하기는 했지만, 기습공격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미군측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공격’이라는 무리수를 둔다. 원래 예정 위치보다 310km 더 떨어진 지점에서 10시간이나 일찍 일본을 향해 출격한 것이다.


일본은 경비정을 통해 미군 항공모함이 근접한 것을 알았지만 함재기에 의한 공습은 항공모함이 좀 더 일본에 접근해야만 가능하므로, 다음날 아침에나 공습이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응에 안일했다. 이렇게 여러 조건이 모두 갖춰지면서 둘리틀공습이 시작됐다.

 

▲ 둘리틀 공습 진행도(그래픽=김영수).     © 경기도민뉴스



미군 폭격기는 일본을 통과해, 12대는 중국 본토에 추락, 3대는 중국 영해에 추락, 나머지 1대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했다. 소련에 착륙한 폭격기 승무원은 억류당하다가 얄타밀약 성립후 석방됐다.


미군측의 피해는 승무원 전사 1명, 행방불명 2명, 포로 8명이었다. 일본군부는 “적기 9대”라고 발표했지만, 폭격 자체가 대낮에 맑은 날씨 속에 이뤄져 민간인 목격자들이 많아 일본군부를 불신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태평양전쟁 ①전쟁의 원인
태평양전쟁 ②진주만 공습
태평양전쟁 ③둘리틀대공습
태평양전쟁 ④과달카날전투
태평양전쟁 ⑤미드웨이 해전

기사입력: 2019/11/12 [08:18]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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