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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광해군, 아들을 시기하는 아버지 선조(?)
총애 후궁ㆍ정비의 소생에 승계 집착하며 국정까지 흔들어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06 [07:00]
[김쌤’s 한국사] = 조선의 역대 왕 중 광해군만큼이나 마음고생을 많이 한 왕은 없을 것이다. 왕에 오르기 전부터 세자책봉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아버지 선조, 왕에 오른 후에는 자신의 집권기반을 견고하게 하려는 대북계열의 연이은 옥사 등은 점차 광해군을 지치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 보은법주사 선조대왕 어필병풍(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2004년 7월9일 지정, 문화재청)     © 경기도민뉴스

01. 광해를 제치고, 총애 후궁의 소생을 마음에 둔 선조
자신이 방계혈통으로 즉위한 선조는 적통(嫡統)에 대한 갈망이 컸다. 그러나 적통의 후계자는 태어나지 않았고, 후궁 공빈김씨(1553년 11월16일~1577년 6월13일)와의 사이에서 난봉꾼 맏아들 임해군과 명민한 수재 광해군을 얻는다.
①성리학적 규범의 지배를 받던 조선과 중국에서는 적장자(嫡長子, 본처 소생의 가장 큰 아들)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 그러나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몇몇 왕은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를 하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갈등을 빚기도.
②선조가 바로 그런 왕 중의 하나였고, 당시 명나라의 신종(만력제)도 그랬던 황제 중의 하나. 명이 광해군을 인정하면(고명, 금인칙서) 명도 3남을 인정해야하는 상황에서 명은 끝까지 광해군의 즉위를 트집. 이 문제는 광해군 즉위 이후에도 두고두고 광해군을 괴롭혀, 뇌물을 주고 왕위를 구입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③열여섯의 나이에 즉위(1567년)한 선조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적장자가 없자, 대신들은 후계문제를 논의하며 세자 책봉을 건의(건저의 사건, 1591년).
④공빈김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선조의 총애는 인빈김씨에게 쏠렸고, 선조는 은근히 인빈김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신성군(1578년~1592년 11월5일, 임란 초기 사망)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내심.
⑤임진왜란을 앞두고 국제정세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당시 조정의 대신이었던 이산해(영의정), 정철(좌의정), 유성룡(우의정)은 선조를 만나는 조회에서 세자책봉을 건의하기로 약속(1591년).
⑥서인 정철(기축옥사에서 동인을 가혹하게 숙청)에게 원한을 품은 이산해는 인빈김씨의 남동생 김공량을 통해,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고, 신성군을 모해하려고 한다고 인빈김씨에게 허위보고 공작.
⑦인빈김씨로부터 정철 등이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의 소생인 신성군을 제거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사전보고를 접한 선조는 정철의 세자책봉 건의를 음모로 판단(건저의 사건)하고 북변의 강계로 유배.
⑧이렇게 해서 일단 세자책봉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일단락.
 
 
02. 임란에서 도망간 아버지, 현장을 누비는 광해군
①임진왜란 발발 직후 한양사수파와 몽진파가 맞서는 가운데, 선조가 신립의 패전 이후 몽진을 결정한 것은 어찌보면 탁월한 정세판단. 우물쭈물하다가 왕이 잡혔다면, 조선은 그대로 왜군의 속국이 됐을지도.
②문제는 그 이후 선조의 처신.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임란 내내 강력한 리더십을 조정 신료와 백성들에게 보여주며 능력 검증받아. 명에서조차 광해군의 능력을 인정.
③그런데도 선조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아. 도대체 속을 모르는 선조의 이후 행동은 조선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을 끝끝내 이순신과 같은 급의 공신반열에 올리는 것에서도 드러나. 전선에서 싸운 의병장을 홀대하고, 자신을 곁에서 호종한 내관들까지도 높은 공신직책을 내린 저의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이라는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안간힘이었을 지도.
④목숨을 걸고 싸운 이순신을 끝끝내 하옥하고 심문(이때의 심문은 과학수사같은 것은 없었고, 원하는 자백을 얻어낼 때까지 고문하는 것이었다)하는 것을 보면, 녹둔도사건때 극형에 처하라는 이일의 상소를 물리친 그 임금과 동일인물인지를 의심할 정도.
⑤전장을 누비며 국난을 극복한 호국간성들을 홀대한 선조의 속내에는 ‘도망친 자(선조)와 맞선 자(이순신)’로 이분하고, 자신과 동류인 도망친 자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과실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그 당시 일상적인 것이라는 식의 물타기를 한 흔적도.
⑥임란 초기만해도 광해군에게 기대를 걸던 선조는 명의 참전으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눈에 띄게 광해군을 홀대하고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
 
 
03. 왕의 폭탄선언, 왕위 선양의 참뜻은
①선조가 왕위를 선양(양보)하겠다고 한 선언은 무려 43회. 살아있는 왕이 건강상의 문제도 아니고, 느닷없이 ‘선위하겠다’라는 선언에 신하들이 넙죽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그래~ 너 원래 왕의 자격이 없었다. 잘 생각했다’라는 것이 돼 거의 역모수준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일.
②왕의 선위에 왕위를 넙죽 받았다가, 피바람이 분 것은 고려 충선왕(1275~1325, 1차즉위: 1298~1299, 2차즉위:1308~1313)이 칼바람을 시전.
③고려와 원 최초의 혼혈왕자로 세계 최강대국 원황실의 외손자와 고려국왕이라는 신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이는 충선왕은 고려에 머물지 않고 연경에서 전지(傳旨, 대면보고, 회의없이 메모장에 왕의 뜻을 적어 내려보내는 형식)를 내려 고려를 통치하는 파행.
④전지를 통한 국정 파행으로 조야의 불만이 높아지자, 충선은 왕위를 세자 감에게 물려준다는 뜻을 비치고, 이를 받아들인 아들과 지지한 신하를 숙청(1310년 1월)하며 공포정치로 흔들리던 왕권을 굳건히 재건.
⑤멀리 고려로 올라갈 필요없이 태종(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선양할 때도 세자(왕의 공식 후계자)였던 세종 자신과 신하들이 극구 반대. 유교적 규범 때문이기도 한 이 반대를 태종은 스스로 강력하게 밀어붙여 양위를 성공시켜. 태종과 다른 선조의 선양선언은 정치적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
⑥그렇지 않았다면, 임란 직후부터 툭하면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겠노라고 40회가 넘게 선언할 이유가 없는 상황. 영조 역시 선양선언으로 세자였던 사도세자를 포함한 신료들을 압박했던 왕.
⑦여하튼, 왕이 선양을 선언하면 세자와 신료들은 “제가 무슨 잘못이 있는지 하명하여 주시옵소서”를 외치며 폭설 속에서도 홑옷만 걸치고 적어도 하루 이틀은 무릎 꿇고 죄를 빌어(석고대죄).
⑧맏아들 임해군은 민간의 부녀자를 겁탈하고 살해하는 등 자질 부족으로 일찌감치 세자책봉에서 멀어졌지만, 자신이 장자라는 것을 내세워(명의 내부적 정치노선을 자신에 대한 호의라고 착각한 듯) 후계다툼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은 참화(임해군의 옥)를 당해 제거.

기사입력: 2017/11/06 [07:00]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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