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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효종의 북벌, 정치적 구호에 그치다
송시열조차도 반대한 북벌…집권층은 분열만 거듭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17/11/22 [07:40]

[김쌤’s 한국사] =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서인정권은 새로운 강대국 후금(청)을 무시하다가 두차례 호란(정묘호란 1627년, 병자호란 1636년 12월~1637년 1월)을 겪는다. 패전으로 청의 수도 심양으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하늘같이 믿었던 명이 자멸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겪는다.

청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전쟁터에 강제로 종군시켰고, 형제는 몽골ㆍ산해관ㆍ금주위ㆍ송산보ㆍ철령위ㆍ개원위 공략에 동행하면서 청의 강력함과 명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 인질생활 8년만에 일시 귀국(1644 인조22)했다가 청이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자 북경으로 다시 귀환한다. 소현세자는 왕위 즉위를 위해 먼저 귀국하지만, 갑작스레 사망(4월26일)하자 효종(1619~1659, 재위 1649년 9월27일~1659)이 뒤를 잇기 위해 귀국(1645년 5월14일)한다.
 
 
01. 효종, 즉위초 반청파 위주 조정 구성
①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명 멸망(1644년) 직후 조선 귀국(1645년 인조23). 봉림대군 효종, 왕위계승 후보였던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인조 사후 조선 17대 왕 즉위(1649년 9월27일).
②인조,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폐위하고 동생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대해 조야에서는 비판여론 비등. 훗날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
③효종, 친청파이기도 한 공서파(功西派)의 낙당(洛黨) 김자점의 강력한 추천으로 즉위하지만 척화파인 영의정=이경석, 예조판서=조경 등으로 김자점과 원두표를 정권에서 소외. 당시 조정은 낙흥부원군 김자점의 낙당과 원평부원군 원두표의 원당으로 분열된 상황.
④효종 즉위초 출사한 김육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유력한 방안으로 ‘대동법’을 강력하게 주장.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에 경기ㆍ강원 지역만 시행하고, 다른 지역은 양반지주들의 반대로 확대 실시 못하던 상황.
⑤김육의 대동법 실시 주장에 집권 서인세력 찬성파 한당(漢黨)과 반대파 산당(山黨)으로 분열.
△한당(漢黨)=소수파,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확충 강조, 김육ㆍ조익(좌의정)ㆍ이시백 형제 등
△산당(山黨)=다수파, 양반지주의 입장과 기득권층 보호(호패법으로 농민의 유랑방지 등 반동적 정책 주장), 김집ㆍ송시열ㆍ송준길ㆍ유공량ㆍ김상헌ㆍ김상용ㆍ허적 등
 
 
02. 효종, 박서를 병조판서로 등용…북벌 준비?
①김육의 끈질긴 주장에 충청도에서 시행한 대동법이 농민생활 안정과 국가재정 확충이라는 성과를 거두자 송시열 등 산당의 반대 줄어들어 대동법 전국 시행의 기초 다져(1651 효종2).
②정권 소외 김자점은 송시열이 인조와 왕비 인열한씨의 묘비문 ‘장릉비문’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것을 북벌의 증거로 청에 효종의 북벌계획 등 밀고하고, 청은 압록강 근처에 군대를 증강배치하며 조선에 진상조사단 파견.
③조선의 이경석ㆍ이시백 등이 조선의 군비확장은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외교적 수완으로 진상조사 무마하고 주동자 김자점은 광양으로 유배.
④유배 중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맏아들 숭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역모사건 발생(1651년 12월, 효종2). 김자점ㆍ조귀인 등 관련자 수십명 처형
 
 
03. 북벌의 핵심 어영청ㆍ훈련도감
①효종 본격적인 북벌 준비한 듯. 병조판서 박서, 과음으로 사망(1653년 6월, 효종4)하자, 원당의 당수 원두표를 병조판서에(7월) 이완을 훈련대장에 임명(10월).
②효종, 북벌 10만상비군 양성을 위해 노비추쇄도감(1655년 1월, 효종6) 설치해 대대적인 노비 단속으로 병력보충하려나 실패. 당시 관청 노비대장에 등록 19만명 중 실제 납공노비는 2만7000명뿐 사실상 신분제도 붕괴.
③표류 하멜 등을 활용 새로운 조총 제작(1656년 효종7)나서나, 조선의 기술력으로 제작이 어렵고 획기적인 성능 개선이 없어 포기. 하멜은 1654년 7월 제주도에 표류.
④효종의 북벌ㆍ숭무 정책으로 이중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불만 거세지자 송시열 등 조정 신료 북벌 반대 움직임(1657년 2월 효종8)
⑤효종은 즉위 초반부터 어영청(인조때 설치) 병력을 2만1000으로 증원하는 등 전 군영에서 군비확장 추진. 방위사령부격인 훈련도감도 2만병력을 갖추고 금군은 기병대로 개편. 남한산성(수비대 수어청)에 대포 300문 설치, 강화에 행궁(임시궁궐) 수축 등 군비 확충.
⑥북벌 선행조건인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국가재정(군량, 무기, 화약, 보급체계, 직업적 상비군 등) 확충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조세 부담이 불가피한 상황. 문제는 집권 사대부는 면세ㆍ면역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통에 부담은 고스란히 일반 민초에게만 전가.

▲ 충북 괴산에 있는 성리학자 송시열의 유적인 화양서원(사적 제417호, 1999년 12월29일 지정).     © 경기도민뉴스
 
 
04. 명분에 그친 북벌과 두차례 나선정벌
①대체적으로 효종의 북벌에 대해 후세 사학자들은 집권층의 프로파간다(정치적 구호) 또는 이데올로기 정도로 평가. 격렬한 숭명배청주의자(가 곧 북벌론자는 아니었다)였던 송시열(1607 선조40~1689 숙종15)조차도 북벌에 대해서는 ‘군왕의 수기(자기수양)’만 강조할 뿐, 뾰족한 방책을 내놓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의 부담만 늘린다고 비판.
②숭명의식이 남아있는 상황(특히 서인계층)에서 효종은 북벌을 통한 국가적 치욕의 설욕, 송시열 등은 사림의 영향력 증대 등의 목적이 맞아떨어진 정치적 동맹으로 폄하하기도.
③효종의 북벌의지에 대해서도 전장터에 강제종군당하며 청의 강성함을 목격하고, 명의 자멸을 지켜본 효종이 불가능함을 모르지 않았으리라 추정하기도.
④일각에서 주장하는 삼번의 난(1673~1681년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 등의 삼번이 청나라에 대하여 일으킨 반란)을 활용하고, 대만의 정성공 등과의 협력설, 나선과의 연합설 등도 허황한 도상작전에 불과.
⑤청을 정벌하려던 조총부대가 청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격퇴한 것이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 그러나 당시 러시아군이 보유한 신식총기류를 조선의 과학기술로 이해불가능하자 개발ㆍ개량을 포기하는 등 강력한 북벌의지가 있었는지도 의심이 가는 상황.
 
 
05. 집권세력 서인, 이합집산 거듭하며 당쟁
①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은 몰락하지만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서파(김류ㆍ심기원ㆍ이귀ㆍ김자점ㆍ신경진)와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대체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 김상헌ㆍ신흠ㆍ오윤겸ㆍ황상ㆍ김상용ㆍ나만갑ㆍ강석기) 등이 대립.
②공서파의 영수 김류는 청류를 견제하기 위해 하위직에 남인 등용, 인조는 공서파를 견제하기 위해 청서파 등용하며 공서와 청서 대립.
③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와 서인정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 감옥에 갇혀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을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전격적으로 처형해 북인은 사실상 와해 상태.
④정묘ㆍ병자호란 때도 공서파(최명길)는 대체적으로 화의를 주장하지만, 청서파(김상헌)는 척화를 주장. 서인세력 내부의 반목과 갈등은 효종~숙종때까지도 이어져 대동법 시행(한당-산당), 예송논쟁(왕권의 정통성 논란), 환국(집권세력의 잦은 교체로 국정 운영의 일관성 저해) 등 곳곳에서 국정운영 파탄 초래.

기사입력: 2017/11/22 [07:40]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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